인권은 보편적 가치이다. 어디에서나 언제나 인권은 보호되고 보장되어야 한다. 이같은 절대적 보편성이야말로 국제사회가 내정간섭이라는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특정국가의 인권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성의 근거이다. 그러나 인권이 개선되고 향상되는 방식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인권의 수준과 개선의 정도가 다르다는 사실은 실제로 인권이 개선될 수 있도록 하는 효율성의 문제가 보편성만큼이나 중요한 기준이 됨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의 인권결의안 통과에서 기권 입장을 견지한 것도 사실은 북한 인권의 열악한 상황을 부인해서가 아니라 북한 인권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접근방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오히려 북한 주민의 일차적 생존권인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건없이 식량을 지원하고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의 일정한 진전을 통해 상호 신뢰가 조성되는 과정에서 대북 인권 개선 요구가 실제로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한국 정부가 표방한 바 있는 대북 인권 4원칙이 이같은 맥락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권 개선 요구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북한 당국이 밖의 개선 요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최소한의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북한에 대한 적대관계를 지속하고 압박을 통한 정권교체의 유혹을 포기하지 않는 나라가 인권 개선을 요구한들 그것은 현실에서 실질적인 북한의 인권 개선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이는 냉전 시기에 북한 당국이 남한의 인권 개선과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 결국은 박정희 정권의 민주화를 주장한 순수한 시민운동마저 북과 내통한 것으로 내몰리게 함으로써 오히려 한국의 인권 개선에 악영향을 미친 경우와 흡사하다.
언젠가 상황이 마련되면 대북 인권 요구는 당연히 제기되어야 할 것이었다.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라 처음엔 조심스러웠지만 탈북자 문제를 점진적으로 확대수용하고, 당국간 회담에서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를 거론하며 최근에 와선 비공식적이지만 인권 개선에 대한 요구도 장관급 회담에서 제기하고 나섰다. 상호 신뢰가 일정하게 쌓이면서 인권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실질적 효율성 측면에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유엔총회의 대북 인권결의안을 찬성하는 것은 언젠가 거쳐야 할 수순이었다. 그러나 이번 결정은 시기적으로 너무나 '정치적인' 고려였다. 지금까지 기권했던 입장이 하필 지금 시기에 바뀌게 된 것을 설명하는 데는 궁색할 수밖에 없다.
남북의 신뢰에 기초하여 소신대로 인권결의안에 찬성한 것이 아니라 북한의 핵실험 이후 대북 제재가 강화되는 국면에서 모든 나라가 북한을 비난하고 있는 상황에 편승해서 순식간에 찬성으로 표변한 것이라는 의구심을 씻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장 비정치적이어야 할 인권 문제에 대해 사실은 가장 정치적인 고려를 통해 시기를 선택한 것이다. 북한이 제재에 포위되고 정치적으로 곤궁한 지경에 몰려 있는 상황을 틈타 남들의 비난에 편승한 것이라면 애초에 견지했던 남북간 신뢰에 바탕한 인권 개선은 오히려 힘들게 된다.
북이 당장 꺼내들 수 있는 카드가 마땅치 않다 하더라도 한국정부에 대한 신뢰만큼은 크게 훼손되었을 것이다. 남북관계의 신뢰를 쌓기 위해 정부는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신뢰에 바탕하지 않는 인권 개선 요구는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공허한 자기만족일 뿐이다.
김근식ㆍ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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