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K 방송기자 출신으로 사고, 재해, 전쟁, 질병 같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날카롭게 드러나는 현장을 취재하면서 논픽션 작가가 된 야나기다 구니오는 57살 때,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고 했다. 당시 25살이었던 아들이 마음의 병을 앓던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내 인생이 송두리째 잘못된 것 같아서 깊은 우울증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몇 달을 보냈습니다. 석 달쯤 지나서였을까, 나는 근처 지하철역에 있는 서점에 들렀습니다. 나는 원래 서점에 가면 소설과 논픽션 신간만 살펴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그림책 코너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림책 한 권 한 권의 이야기에서, 그림과 말 하나하나에서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10여 년, 머리가 허연 노인이 지금도 지하철 안에서 그림책을 본다. 이미 그림책의 포로가 된 그는 말한다.
“나는 인생 후반기야말로 그림책을 곁에 두고 찬찬히 읽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책을 읽고 있노라면 정신없이 바쁘게 사느라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 유머, 슬픔, 고독, 의지, 이별, 죽음, 생명에 대한 생각들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바람이 스산해지는 늦가을이다. 쉽게 욕심내고, 쉽게 들볶이고, 쉽게 포기하고, 쉽게 잊어버리는 어쩔 수 없는 인스턴트 시대의 ‘어른’이 읽었으면 싶은 그림책을 하나 권한다. 내가 거대도시 하나가 땅 속에서 갑자기 솟아오르고, 클릭 한 번에 무언가 퍽- 퍽- 등장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같은 오늘의 어떤 ‘속도’라는 것을 괴기스럽다고 느낄 무렵에 읽은 책, <마지막 거인> (프랑수아 플라스 지음ㆍ디자인하우스 발행)이다. 마지막>
우연히 주먹만한 이빨 하나를 사게 된 지리학자 루트모어는 거기에 그려진 그림 속 ‘거인족의 나라’를 찾아 나선다. 험한 여행 끝에 도착한 미지의 나라에는 거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3,000년 이상 어떤 숲도 파괴하지 않고, 어떤 강물도 더럽히지 않고, 어떤 동물도 멸종위기에 빠뜨리지 않고 살아왔다. 루트모어는 그들과 열 달을 함께 지내면서 친구가 된다.
하지만 다시 ‘인간’들의 세계로 돌아온 루트모어가 거인들의 실존을 밝히는 보고서 <거인 나라로 떠나는 여행> 을 쓰면서 세상은 시끄러워진다. 발빠른 장사꾼들은 황금을 찾듯 거인족을 찾아 먼저 떠나고, 뒤늦게 거인 친구들을 찾아 나선 루트모어는 마차에 실려 끌려오는, 아름답고 숭고한 거인 안탈라의 머리를 보게 된다. 거인>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친구의 애절한 물음에 루트모어는 말한다. “거인들이 진짜로 있다는 달콤한 비밀을 들추어내고 싶었던 내 어리석은 이기심이 이 불행의 원인이라는 것을 나는 마음 속 깊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펴낸 책들은 포병 연대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거인들을 살육한 것입니다. 별을 꿈꾸던 아홉 명의 아름다운 거인과 명예욕에 눈이 멀어버린 못난 남자, 이것이 우리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이 책은 1992년 프랑스 몽트뢰이 어린이도서 전시회와 프랑스 문인협회에서 어린이도서 부문 대상을 받았다. 1993년에는 프랑스 어린이 전문서점과 도서관 협회가 공동으로 선정하는 마법사 상과 벨기에 비평가들이 주는 최우수 어린이 그림책상을 받기도 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고 자신을 낳아준 자연을 파괴하며 마구 죽이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인간의 사악한 이기심을 조용히 비판하는 책이다.
어린이도서관 ‘책 읽는 엄마 책 읽는 아이’ 관장 김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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