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글·이혜리 그림 / 계수나무 발행·44쪽·9,800원
남을 제치고 달려나가는 것이 제일의 가치로 변해버린 게 그 즈음이었을까. 안도현 시인이 어른들을 위한 동화 <관계> 를 펴냈다. 각박해지는 삶의 징후를 읽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표제작이었던 글이 그림과 어우러진 ‘진짜’ 동화로 나왔다. 관계>
땅에 떨어진 도토리 하나. 도토리는 자신을 갖은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낙엽이 고맙고, 보답할 길이 없어 속상하다. 하지만 낙엽은 도토리가 무사히 싹을 틔워 갈참나무가 되어주는 것이 서로의 꿈을 이루는 일이라 말한다. 무심코 지나치면 보이지도 않을 이 작은 도토리 안에 얼마나 큰 경이가 숨어있는지 낙엽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순환하는 생명의 고리에서 도토리와 낙엽은 서로 도와주며 함께 살아가는 ‘관계’를 맺는다. 눈이 녹고 낙엽들이 썩어 가루로 사라져버릴 찰나, 도토리는 온 몸이 터질 듯한 고통 속에 마침내 싹을 틔운다. 낙엽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재탄생이, 그리고 도토리의 존재 의미가 실현된다.
수많은 펜 터치로 거친 듯하지만 푸근한 그림은 오랜 시간 임자를 기다린 보람이 있다. 도토리를 감싸는 낙엽들의 모습에선 아기를 안은 엄마의 품이 떠오른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맺는 관계가 부모·자식인 것처럼. 마지막 페이지, 수없이 많은 어린 갈참나무들로 출렁이는 숲은 아름다운 관계들이 빚어낸 작품이기에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관계의 모양새가 하나가 아니듯 사람마다 낙엽과 도토리의 역할이 정해진 것은 아닐 게다. 언제는 낙엽처럼 거름이 되었다가, 언제는 도토리처럼 꿈을 틔울 수 있다. 다만 아이라면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깨달아 가는 도토리에 더 눈길이 갈 법하다. 박선영기자
박선영 기자 philo9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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