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스파게티를 좋아하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 딱 두 종류다."
요즘 이런 식의 이분법이 유행이다. 어느 광고에도 나오는 걸 언뜻 들었다. 이런 문장을 읽은 것은 아마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가 아니었나 기억된다. 여기서 스파게티는 꼭 스파게티가 아니라도 된다.
스파게티라는 단어를 된장보리밥이나 재즈로 바꿔도 좋고, 얼마 전에 세상을 뜬 폴 모리아의 음악으로 대치시켜도 무방하다. "나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마이 퍼니 발렌타인'을 좋아하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 딱 두 종류다." 어떤가, 명쾌하지 않은가. 세상과 인간을 딱 둘로 나눌 수 있는 이 이분법이 명쾌한 것은, 왜냐하면 그 기준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너는 그래?" 하고 넘겨버릴 수 있는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스파게티를 좋아하든 도다리회를 좋아하든, 그것들을 기준으로 세상과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더라도 "그래? 나는 도다리회는 그저 그렇던데, 참치회가 낫지" 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 명쾌한 이분법은 그런데 그 기준이 조금 달라지면 엉뚱한 결과를 초래한다. 스파게티 대신에, 결례일지 몰라도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대입시켜 보자. 저녁 선술집에서 누가 이 말 했다 치자, 당장 격론 일고 싸움 나고 이민 가라 소리 들을 사람도 생긴다.
혹은 도다리회 대신에 '시장'이라는 조금 골치 아픈 개념을 슬쩍 집어넣어 보자. 앉은자리에서 '반시장' 나오고 '시장친화' 나오다가, '반기업' '반부자 정서' 나오면서 싸움 대판 커질 수도 있다.
문제는 한국사회의 여론이 이런 식의 이분법에 너무도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으며, 또 그걸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당초의 이분법에서 취향의 기준에 불과했던 스파게티나 재즈를, 우리 사회의 여론은 이념이나 색깔 혹은 진보와 보수, 시장과 반시장의 싸움으로 바꿔버린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른 두 부류의 인간 중 한 부류는 말살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한창 시끄러운 부동산 문제를 보자. 시장론자들은 "시장을 무시하고 시장에 반하는 정책 때문에 부동산 광풍이 일어났다"며 '시장의 반란'을 부동산가격 폭등의 이유로 꼽는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서민들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도대체 무슨 시장에서 집 한 채가 자고 나면 1억원씩 호가가 올라가는가.
올 1월에 22억 하던 강남구의 한 아파트가 한 달에 1억원씩 올라 지금 33억원이라니, 이건 분명 정상적인 시장이 아니다. 오죽하면 한 네티즌이 '건설사, 투기꾼, 다주택자'를 '부동산3족'으로 규정하고 '부동산 공화국'인 대한민국의 모든 정책은 그들에게서 나온다고 비아냥하는 '부동산 헌법'을 선포했을까.
시장의 실패이지 시장의 반란이 아니라면 다른 대책이 모색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정책당국은 공급 부족이라고 외치는 여론이란 것에 밀려, 엉뚱한 곳에다 집을 164만 가구나 더 짓겠단다.
"나에게 단 하나의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라도 감옥에 보낼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였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는 빨갛고 매운 스파게티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하자, 괴벨스는 "너는 왜 시장을 사랑하지 않고 빨간 스파게티만 사랑하느냐"며 그를 감옥에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설득하기다는 도취시키고 박멸시켜 버린다'는 괴벨스의 선전선동술은 역설적이게도 현대 선전선동술의 기원이 됐다. 이런 선전선동이 한국사회에 망령처럼 설치고 있다.
하종오 피플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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