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서 저항과 투쟁의 상징이었던 서울대 아크로폴리스(Acropolis)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는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1975년 이후 각종 시국 선언과 반 정부 집회, 총학생회 행사 등이 펼쳐진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리스 민주주의의 상징인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이름을 따온 이 광장은 서울대생뿐만 아니라 노동자 대회 등 굵직한 시국 관련 행사의 주무대였다.
그러나 14일 열린 제50대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 1차 유세는 사상 처음으로 아크로폴리스가 아닌 다른 장소(문화관 앞 마당)에서 펼쳐졌다.
사연은 이렇다. 6일 총학 선거 출마를 선언한 비운동권 성향의 세 후보 측은 아크로에서 열린 선거운동본부 공동 발족식에 불참했다. 이들은 “아크로에서 행사를 하면 바로 뒤에 있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방해가 된다”며 “아크로에서의 유세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선거관리위원회와 운동권 성향의 네 후보를 비롯해 7개 후보측 대표들은 곧바로 대책회의를 열었고 결국 ‘도서관 소음 문제’를 제기한 후보측 의견을 받아들여 총학생회 유세 장소를 바꿨다.
한 후보측 관계자는 “학생회 선거에 무관심한 학생들을 방해해 더 많이 외면 받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이같이 결정했다”며 “운동권을 바라보는 일반 학우들의 시선이 그만큼 차갑다”고 말했다.
아크로에서 만난 농생대생 박모(24)씨는 “(아크로는) 몇 년 전부터 농구 경기장이나 록 밴드 공연장으로 쓰이고 있다”며 “선배들이 이곳에서 느꼈던 치열함이나 비판 정신은 우리에게 그 다지 중요치 않아 보인다”고 했다.
졸업생들은 하지만 “당황스럽다”“안타깝다”는 반응이다. 1990년대 중반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했던 사회대 출신 K(33)씨는 “악천후로 유세를 연기한 적은 있지만 아크로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선거 유세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일”이라며 “후배들 선택을 존중하지만 아크로의 상징성을 너무 소홀히 여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자연대 출신 기업인 Y(40)씨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확성기를 통해 아크로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듣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려 했기 때문에 소음은 문제되지 않았다”며 “시끄러울 까봐 장소를 옮겼다는 말이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반면 총학생회 간부 출신 L(38)씨는 “옛날처럼 한 장소(아크로)에 모여 몇 시간 동안 추위에 떨며 유세를 듣는 시대는 지났다”며 “장소가 아니라 온라인 중계 등 자신의 주장을 일반 학생에게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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