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맞붙은 1971년 대통령선거는 한국정치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선거에서 김 전 대통령은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다. 그러나 선거를 직접 참관한 대학생 선거참관인단과 미국의 선거전문가팀은 부정선거가 없었다면 그가 승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개인적으로 부정선거를 막기 위해 대학생 참관인단을 자원했다. 그리고 부정선거의 현장들을 목격하고 선거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해 다른 학생대표들과 야당인 신민당을 찾아갔다. 당대표를 만나 곧 있을 국회의원선거를 보이코트하라고 요구했다.
●사당정치 없애려 90년대부터 주장
이같은 평화적이고 우호적이었던 신민당 방문을 박정권은 ‘신민당사 난입사건’으로 몰고 가 학생들을 선거법 등으로 구속해 기소했다. 박정권 덕분에 어이없이 DJ 때문에 감옥을 간 대학생 1호가 되고 만 것이다. 이후 유신과 5공을 거치면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되어버린 DJ에 대한 나의 지지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87년 국민들이 6월항쟁을 통해 얻어준 민주화의 결정적 기회를 김 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과 분열로 날려보내는 것을 보면서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후 전남대 교수가 되어 광주에 살면서 DJ가 노태우 정권과의 초기 밀월,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의 연합과 같은 군사독재세력과의 야합을 통해 호남의 한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다른 두 김과 함께 지역주의를 볼모로 사당정치를 펴는 것을 보면서, 3김정치 청산을 주장했다.
사실 70년대 초의 40대 기수론, 신민당의 민주적 경선과 결과 승복이 보여주듯이 3김 이전에는 최소한의 정당민주주의가 존재했다. 그러나 3김 이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개인독재인 사당정치가 자리잡은 것이다.
3김이 국회의원 후보 등을 밀실 공천하는 사당정치를 깨기 위해 개인적으로 90년대 초반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도 미국처럼 국민들이 당의 후보를 뽑는 프라이머리, 즉 예비선거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진성당원이 거의 없는 우리의 현실을 고려해 당원이 아니더라도 그 당의 지지자면 누구나 당의 후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오픈 프라이머리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당원의 영향력이 약해져 정당의 의미가 없어진다느니, 상대방 당의 유력후보를 떨어트리기 위해 약한 후보에 표를 몰아주는 공작이 우려된다느니 하는 반론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적 추세는 당원이 아니라 ‘지지자 중심 정당’으로 가고 있다.
또 당원이 아니더라도 특정 정당을 찍으면 그 정당은 그만큼 국고보조를 받기 때문에 지지자들도 후보 결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공작투표 역시 유권자가 프라이머리에 어느 당이든 한번밖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중복투표를 금지하면 해결이 된다. 그러나 나의 주장은 3김공화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광야의 메아리로 그치고 말았다.
열린우리당이 문제의 이 오픈 프라이머리를 내년 대통령후보 선거부터 적용하기로 결정하고 법 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3김정치에 맞서 외롭게 이를 주장해온 당사자로서 감개가 무량하다.
●‘지지자 중심 정당’이 세계적 추세
다만 이미 시행하고 있는 국민참여경선과 오픈 프라이머리는 당원과 일반 지지자 중 누구를 중시하느냐는 문제로 어느 것이 낫다고 할 수 없고 국민참여경선도 충분히 민주적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대선 후보는 어느 정도 민주적으로 뽑지만 국회의원 후보 등은 전략공천이라며 아직도 하향식으로 뽑는 경우가 많은 것이 진짜 문제라는 사실은 기억해야 한다.
이제 사당정치는 극복됐지만 3김정치의 또 다른 축인 지역주의는 아직 건재하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이를 잊고 나 자신을 위한 축배를 마셔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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