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중간선거 다음 날인 8일(현지시간)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전격 경질한 것은 민주당에 내미는 화해의 손길이다. 12년만에 상ㆍ하 양원 지배권을 민주당에 내어준 선거 참패의 결과를 그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일방주의 노선으로 비판을 받아 온 부시 대통령이 기민하게 움직인 것은 레임덕 가속화를 가능한 저지하면서 그나마 정책의 일관성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은 민주당과의 타협밖에 없다는 현실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텍사스 주지사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 ‘분리주의자가 아닌 통합주의자’로서 민주당과 초당적 협력을 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차기 하원의장인 민주당 낸시 펠로시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의장 당선자 여사’로 호칭하면서 민주당 지도부를 9일 오찬에 초청하는 등 성의를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정권 내 핵심세력에 대한 더 이상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럼스펠드 장관을 희생양으로 선택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부시 대통령은 럼스펠드 장관과 함께 사퇴 요구가 제기됐던 딕 체니 부통령을 해임할 의사가 없음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 이번 선거패배를 통해 선거책략가로서의 명성마저 완전히 땅에 떨어진 칼 로브 백악관 비서실 차장의 거취도 관심거리이지만 부시 대통령이 럼스펠드 장관을 경질하면서 ‘더 이상은 안돼’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로브 차장도 살아남을 것으로 예상된다.
부시 대통령의 의도가 민주당과의 진정한 협력모색에 있든 궁지탈출을 위한 고육지책에 있든 이라크전 정책을 비롯한 대외정책의 수정은 불가피해졌다고 봐야 한다. 민주당이 이라크전에 임하는 미국의 노선 수정에 최고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이 미봉책으로 민주당을 상대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이미 이라크전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한 민주, 공화 양당 지도자간 ‘정상급 회의’를 제안해 놓고 의회에서 부시 대통령의 실정에 대한 청문회를 열겠다고 벼르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전 정책의 수정과 관련해서는 현재 초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라크 연구그룹’의 보고서를 매개로 활용할 생각인 것으로 보인다.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과 리 해밀튼 전 민주당 의원이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이 그룹은 조만간 보고서를 제출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같은 부시 정권의 뒤늦은 방향 전환에 대해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으로 지목한 국가들이 ‘(미 대외정책) 실패의 축’국가로 돌아와 반격을 시작하는 것을 막기 어렵게 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케이토연구소의 크리스토퍼 프레블 외교정책담당 국장은 “부시 대통령으로선 외교정책의 기존 방향을 전략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더 이상 장악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다른 전문가들은 “부시 정권의 외교정책 실패로 인해 ‘악의 축’ 국가들이 ‘실패의 축’ 국가로 거듭났다”고 비유했다.
워싱턴=고태성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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