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의 라이프소프트연구소(LSRㆍLife Soft Research). 1989년 설립돼 '고객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해온 LG전자 고객가치경영의 산실이다.
이 곳에 활동하는 연구원은 모두 44명. 이중엔 심리학 전공자도 있고, 인류학 사회학 경영학 전문가도 있다. '고객'을 입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다.
연구소 관계자는 "한 단면으로만 접근해선 결코 고객이 원하는 것을 파악할 수 없다"며 "고객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 욕구를 제품에 반영하려면 모든 지식과 데이터베이스를 동원한 다면분석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LSR은 일종의 '고객학 종합연구소'인 셈이다.
통상의 연구소에선 특정기술이나 제품 콘셉트부터 개발, 고객에 접근하는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LSR에선 먼저 고객의 라이프스타일과 세상의 트렌드를 먼저 정밀분석한 뒤 고객 자신도 미처 표현하지 못한 포인트를 끄집어내, 기술과 접목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LG전자가 만든 기발한 아이디어의 휴대폰과 생활가전 제품들은 대부분 LSR에서 잉태된 것들이다. 생방송 화면도 멈췄다가 다시 볼 수 있도록 한, 그래서 주도권이 TV에서 시청자로 넘어오도록 한 빅히트작 '타임머신TV' 역시 'LSR산(産)'이다.
'TV를 보더라도 더 이상 TV에 끌려가지 않고 이젠 내가 TV를 조종하고 싶다'는 시청자들의 잠재적 욕망을 LSR포착하지 못했다면, 타이머신TV는 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구본무 LG회장의 경영이념인 고객가치경영의 흔적은 LG 곳곳에서 발견된다. LSR말고도 LG에는 유독 고객 관련 조직과 모임이 많은데, 이 역시 그런 맥락이다.
지난해 11월 출시 이후 전세계적으로 450만대 이상 팔린 글로벌 베스트셀러인 '초콜릿폰'의 성공신화도 출발점은 LG전자의 '싸이언 프로슈머' 모임이었다.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인 '프로슈머(prosumer)'란 생산과정에 소비자가 참여한다는 뜻. 제품기획단계부터 소비자들의 요구와 신선한 발상을 가미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싸이언 프로슈머'모임에서 소비자들은 복잡한 기능을 과감히 생략하는 대신 감성강조형 디자인과 버튼대용의 터치패드 등을 제안했고, 이는 결국 초콜릿폰의 탄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차분하고 단조로운 패턴에서 탈피, 과감하게 변신한 LG화학의 벽지 '지인(Z:IN) 모젤'도 마찬가지다. 박재완 LG화학 디자인연구소 디자이너는 "소비자 시장조사를 통해 화려한 꽃무늬와 큰 기하학 무늬 같은 튀는 패턴이 수요가 많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정말 잘 팔릴지는 반신반의했다"며 "그러나 고객의 소리를 철저히 제품에 반영했고 이는 결국 빅히트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 벽지는 9월말까지 매출 20%, 영업이익은 50%의 놀라운 신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LG가 아직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고객가치경영 이념이 제품으로 속속 현실화되고 있지만, 구 회장은 여전히 고객을 향한 목소리의 톤을 낮추지 않고 있다.
LG경제연구원 윤여중 연구원은 "경영의 성과는 결국 실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고객가치경영의 성패도 결국 향후 LG의 실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며 "단지 고객불만을 잘 처리하는 친절 개념이 아닌, 제품개발부터 생산 유통 판매 애프터서비스까지 모든 과정에 고객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희상 성균관대 교수도 "제조업의 고객가치경영 수준은 전반적으로 서비스 산업에 비해 많이 뒤떨어져 있다"면서 "고객과의 접점을 비즈니스의 출발점이 되도록 조직 체질 자체를 바꿔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어차피 고객가치 실현을 위한 기업활동의 여정에 끝이란 있을 수 없다. 구 회장이 '고객숭배'가 또 어떤 히트작을 만들어 낼 지 지켜볼 일이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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