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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37> 아나톨리 부크레예프(1958~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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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37> 아나톨리 부크레예프(1958~1997)

입력
2006.11.08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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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의 에베레스트는 대참사의 현장으로 기억된다. 당시 그곳은 전세계로부터 몰려온 숱한 원정대와 상업등반대로 북새통을 이루었는데, 정상 바로 밑 힐러리스텝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가치관에 혼란이 생길 정도다.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그 칼날능선의 자태는 도도하고 위엄에 넘치는 모습이어야 될 것 같다. 하지만 당시의 사진 속에 찍혀 있는 힐러리스텝의 모습은 일요일의 도봉산 포대능선과 다를 바 없다. 한 마디로 교통체증이 생겨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모두들 넋을 놓고 있는 형국이다.

그곳의 고도는 해발 8,600m를 넘어선다. 그곳의 공기 속에 들어 있는 산소는 평지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곳을 통과하는 유일한 칼날능선 위에서 끔찍한 교통체증이 일어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끔찍한 일이다. 이제 노멀루트로 오르는 에베레스트는 ‘등반가치가 없는 산’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그

리고 96년, 마치 그런 우려들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그곳에서 대참사가 일어났다. 급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폭설이 쏟아져 내리면서 힐러리스텝은 통행 불가능한 루트가 되어버렸고 덕분에 그곳에서 발이 묶였던 숱한 산악인들이 비참하게 죽어간 것이다.

당시 그곳에 있었던 산악 가이드 겸 작가로서 이 대참사의 현장을 낱낱이 기록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희박한 공기 속으로> (1997)를 써낸 사람이 존 크라카우어다. 실화를 기록한 이 책은 소설보다 흥미진진하고 영화보다 드라마틱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명 두명씩 죽어가는 실존 인물들이 남긴 최후의 절규는 읽는 이의 가슴에 잊혀지지 않는 전율과 상처를 남긴다. 존 크라카우어는 이 책을 통하여 한 동안 세계 산악계를 들끓게 만들었던 몇 가지의 논쟁 주제들을 던졌다. 첫째, 상업등반대는 도덕적 기술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가. 둘째 러시아의 산악인 아나톨리 부크레예프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될 것인가.

상업등반대가 논쟁의 핵심으로 떠오른 것은 당시 사망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하고 상업등반대에 합류했던 일반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돈만 내면 누구나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가. 고산등반 능력이 미비되어 있거나 아예 전무한 사람들까지 고객으로 받아들이는 상업등반대의 행태는 과연 올바른 것인가. 아나톨리 부크레예프가 특별히 도마에 오른 것은 당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 중 가장 등반능력이 뛰어났던 전문 산악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존 크라카우어는 당시 로브 홀이 이끄는 상업등반대 소속이었고, 아나톨리 부크레예프는 스코트 피셔가 이끄는 상업등반대 소속 가이드였다.

존의 책 속에 묘사된 아나톨리의 모습은 ‘이기적인 악마’였다. 그는 고객의 안전을 무시하고 자신의 성취욕만을 위해서 등반했으며 치명적인 조난사고가 발생하자 저 혼자 살겠다고 내뺐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아나톨리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상업등반대라는 이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등반 형태 자체가 비난 받아 마땅하다. 물론 아나톨리는 즉각 반박했다. “존은 참사 현장의 극히 일부분을 보았을 뿐이며, 그의 책은 침소봉대와 아전인수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아나톨리의 목소리는 존의 목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아나톨리는 전문 산악인이었을 뿐 작가가 아니었으며, 존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과 <플레이보이> 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유명 작가였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존의 책 <희박한 공기 속으로> 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등극하자 아나톨리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제 그는 전세계 독자들의 기억 속에 ‘저 혼자 살겠다고 고객들 모두를 죽음의 현장에 방치해버린 나쁜 놈’으로 남게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일반인의 세계와 전문가의 세계는 다르다. 아나톨리는 1996년의 대참사가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히말라야 고산 등반계에서 가장 주목받던 전문 산악인이었다. 초경량 속도등반으로 당시까지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을 만큼 뛰어난 역량을 갖춘 산악인이었고, 한번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을 만큼 ‘인간성 좋은 친구’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일찍이 라인홀트 메스너 조차 그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철인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칭송했을 정도다. 책의 판매부수가 곧 진실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아나톨리와 그를 사랑하는 산악인들은 존의 책에 기술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끈질기게 주장하고 전파했으며, 결국 이들의 반론을 받아들여 미국산악회에서는 공식적인 조사위원회를 발족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들이 치밀한 조사활동 끝에 내린 최종적 결론은 <희박한 공기 속으로> 에 묘사된 것과는 정반대다. “틂づ潁?부크레예프는 당시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베테랑급 고산 셰르파들 조차 구조활동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상황에서 저 혼자 영웅적인 구조활동을 벌여 3명의 조난자를 살려낸 공로가 인정되므로 미국산악회가 용감한 산악인에게 수여하는 ‘데이비드 솔즈’ 상을 수상한다.” 뒤늦게나마 명예를 회복한 아나톨리는 시상식장에서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산은 나의 전부이며 종교입니다. 나는 산 위에서 단 한번도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나의 영혼이 가장 맑고 순수해지는 것은 내가 산 위에 있을 때입니다. 당시에 좀 더 많은 조난자들을 구해낼 수 없었던 것에 대하여 죄송하게 여길 따름입니다.”

■ 舊소련 크로스컨트리 국가대표 초경량 속도등반으로 이름 날려

러시아에서 태어난 아나톨리 부크레예프는 대학 재학 시절에 이미 파미르의 6,000~7,000m 급 여러 산을 등정했으며 코카서스 지역에서 기술등반을 익혔다. 국가대표급 크로스컨트리 스키강사로 일하던 그가 히말라야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89년의 러시아 캉첸중가(8,586m) 등반대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당시 그는 이 산에 있는 4개봉의 정상을 모두 밟으며 캉첸중가 산군을 트래버스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전문 산악인으로 나선 것은 구소련의 붕괴 때문이다. “더 이상 월급을 받을 수 없으니까 저 혼자 힘으로 돈을 벌어야 했죠.” 그는 91년에 에베레스트 단독등반을 해냈고, 94년에는 미국 상업등반대의 등반대장으로서 마칼루(8,463m)에 올랐다. 이 당시부터 그는 초경량 속도등반이라는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하기 시작했는데, 마칼루 등정에 소요된 시간은 46시간이었다. 95년의 다울라기리(8,167m)는 17시간 15분, 97년의 브로드피크(8,047m)는 36시간, 가셔브룸1봉(8,068m)은 9시간 37분이 소요되었다.

아나톨리는 에베레스트 4회, 다울라기리 2회, 로체 2회를 포함하여 8,000m급 11개봉의 정상을 모두 21회 올랐다. 이들 중 89년의 캉첸중가와 97년의 에베레스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산소 등정이다. 그가 이전까지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며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14개봉을 완등하리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97년의 크리스마스날, 안나푸르나(8,091m) 서릉을 오르던 도중 눈사태에 휩쓸려 사망하고 만다. 향년 39세의 불꽃 같은 삶이었다.

산악문학작가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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