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길었죠? 더 드릴 말이 남아있질 않네요. 나를 믿어줘요. 여러분이 항상 지켜봐 주세요.” 남편 페론 대통령에게 남기는 사연에 객석위로 비장미가 감돌고, 일세를 풍미한 여인은 스러진다. 가 마지막 위로처럼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감싼다.
1978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돼 토니상을 석권하는 등 세계를 누빈 뮤지컬 <에비타> 가 늦가을 국내 무대를 찬란한 비극으로 물들인다. 이번 공연은 국내에선 처음으로 정식 라이선스를 통해 소개되는 무대다. 에비타>
뮤지컬 음악의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선율이 전편에 흐르는 이 작품은 오페라적 뮤지컬의 모범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철의 여인 에비타를 더블캐스팅으로 거머쥔 주인공 배해선과 김선영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둘 다 극중 에비타의 나이와 같은 33세. 대사 없이 음악으로만 이어지는 2시간 15분(휴식 15분) 무대 중 1시간 30분을 노래로 감당해야 하는 중책을 안고 있다.
폭발적 연기의 김선영, 섬세함의 대명사 배해선 등 두 사람이 서게 된 무대 <에비타> 는 그들의 외나무 다리다. 둘의 강조점은 약간씩 어긋나 있다. 배해선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에비타의 면모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다짐한 반면, 김선영은 “불덩이 같은 그녀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최선을 다 하겠다”고 벼른다. 연출가 배해일씨는 “한 남자의 여인으로서, 그녀의 치열한 삶을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에비타>
이 작품은 원래 시각적 효과를 배제한 채 탱고로 대표되는 아르헨티나의 풍성한 음악적 자산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 성패를 걸고 있다. 영국 공연의 경우 아예 한 무대 세트에서 공연이 모두 진행된다. 그러나 45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이번 국내 무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가지를 재현하는 등 23개로 이뤄진 장면마다 세트를 바꿔가며 다채롭게 꾸몄다. 라틴, 재즈, 팝, 록 등 풍성한 음악적 콘텐츠를 남미의 풍물 속에서 얼마나 살려낼 지도 관심이다. 일절 대사를 배제한 이 작품이 ‘20세기 뮤지컬의 꽃’이라 불리는 이유다.
에바가 과거를 회상하며 를 부르는 대목 등에서 탱고의 아찔함을 최대한 활용한 대목은 이번 한국 공연의 자랑이다. 아르헨티나에서 탱고 전문 댄서 한 쌍을 불렀다. 스페인 탱고도 쿠바 탱고도 아닌, 탱고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각오다. 장례식에서까지 탱고를 추는 아르헨티나 특유의 풍습 등 오리지널 탱고의 정서가 그대로 삼투된다.
국내 <에비타> 공연사에서도 굵은 획을 긋는다. 1981년 극단 현대극장이 초연한 뒤, 1988년 같은 극단이 조영남(체 게바라), 이경애(에바) 등의 배역으로 세종문화회관에 올렸다. 라이선스에 대한 개념이 없던 때라 음악과 대본 등은 모두 불법이었다. 정작 문제는 정치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을 당국이 알고나서였다. 정부 압력으로 예정보다 빨리 막을 내려야 했던 기막힌 시절이었다. 에비타>
이번 공연은 지난 6월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막 올린 <에비타> 와 동시 공연되는 기록도 갖게 됐다. 체 게바라에 남경주, 후안 페론에 송영창, 페론의 정부에 김소향 우금지 등 출연. 17~2007년 1월 31일 LG아트센터. 화~금 오후 8시, 토ㆍ일 3시 7시. (02)501-7888 에비타>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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