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숲은 수다스럽다. 단풍 곱게 물든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느라 사각사각, 겨울날 준비로 바쁜 다람쥐가 마른 낙옆 위로 뛰어 다니느라 바스락 바스락.
아침 햇살 비스듬히 치고 들어오면 낙엽 두툼히 덮힌 오솔길은 황금빛으로 빛난다. 그 황금 카펫 위를 거니는 가을 산행길. 절경의 단풍 산행으로 이름 높은 경북 봉화의 청량산(淸凉山ㆍ870m)으로 향했다.
낙동강 상류에 그려진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청량산. 퇴계 이황은 이 산의 12개 봉우리를 ‘육육봉(六六峰)’이라 했다. 청량산 산행의 일반적인 출발점은 청량폭포와 선학정, 입석 등 3곳. 이중 청량산이 품은 아름다운 사찰, 청량사를 지나기 위해서는 선학정이나 입석으로 올라가야 한다.
선학정에서 등산화를 조여 매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청량사까지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일부 포장한 도로다. 구불구불 휘돌아 오르는 길. 발바닥은 흙길이 아닌 탓에 산 타는 재미를 못느꼈지만 눈맛은 그만이다. 고운 단풍 속으로 몸이 스며드는 느낌이다. 길에서 만나는 바위들 모양이 기괴하다. 주먹만한 자갈들을 가득 품고있는 청량산의 바위들은 수 만년 시간이 빚어낸 자연 콘크리트다.
터벅터벅 숲과 대화하며 20분쯤 오르니 청량사다. 청량산 12봉우리 한가운데 들어앉은 고혹적인 사찰이다. 봉우리들은 꽃잎이 돼 청량사를 꽃술 삼아 한데 감싸 안은 연꽃 형상이다. 안심당과 범종루를 지나 오르면 사찰의 중심 건물인 유리보전. 화려하지도 그리 크지도 않지만 기품과 위엄이 있다. 유리보전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이고 법당에는 종이로 만든 지불인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사찰을 뒤로하고 유리보전 왼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올랐다. 의상봉과 자소봉의 갈림길. 자소봉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까지의 산길과 달리 급경사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계단길을 호흡을 고르며 올랐다. 능선에 올라서니 등줄기를 타고 땀이 주르륵. 소나무 사이를 비집고 벼랑 끝으로 다가섰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사찰이 다소곳이 들어앉았다. ‘연꽃의 꽃술’ 모양이 실감이 난다.
금탑봉 쪽으로 돌아 내려오는 길. 호젓한 산길엔 이름 모를 예쁜 새들과 다람쥐들이 동무해 외롭지 않다. 봉우리들 사이로 청량사가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시선을 떨군 풍경 한 컷 한 컷이 그림이고 예술이다. 단풍 빛 곱게 물든 그림 속을 걷는 행복한 산행이다.
금탑봉 가기 직전 신라의 명필 김생이 머물렀던 김생굴이 있다. 이곳에서 9년을 공부하던 김생이 “이만하면 됐다”고 하산하다가 봉녀라는 아가씨를 만났다고 한다. 봉녀는 자신의 길쌈 솜씨와 글씨를 겨루자고 했고, 김생은 이 겨루기에서 지게 된다. 김생이 다시 굴에 들어가 1년을 더 매진, 10년을 채웠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명필인 한석봉 일화의 원조가 아닐까 한다.
최치원이 물을 먹고 총명함이 배가 됐다는 총명수와 치원암이 있던 풍혈대를 지나자 ‘외청량사’로도 불리는 응진전이다. 벼랑 끝에 절묘하게 올라서 금탑봉과 그림같이 어우러졌다. 1,300년 역사를 가진 응진전은 고려 때 공민왕이 홍건적 때문에 피난왔을 때 노국공주가 불공을 드렸던 곳이다. 청량산 남쪽 봉우리인 축융봉에는 이때 쌓은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응진전을 지나 입석으로 내려오기까지 산행이 걸린 시간은 3시간. 몸과 마음에 청량한 기운을 담뿍 받아낸 소중한 시간이었다.
청량산(봉화)=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퇴계오솔길 '선비와의 대화'
청량산은 퇴계 이황 선생이 유독 사랑했던 산이다. 청량사 바로 아래에 있는 청량정사는 어릴 적 퇴계가 숙부 송재 이우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곳이고, 말년에 도산십이곡을 저술한 곳이다.
퇴계는 안동시 도산면의 도산서원에서 낙동강변을 따라 청량산을 오가며 시상을 떠올렸다. 퇴계가 다니던 길의 일부분이 고맙게도 개발의 광풍을 피해 지금까지 남아있다. 단천교와 가송리 사이 3km 되는 이길을 ‘녀던길(옛길)’ 혹은 ‘퇴계오솔길’이라 부른다.
낙동강의 아름다운 강풍경이 내내 함께 하고 청량산에서 흘러내린 산자락이 절경을 빚어내는 곳이다. 퇴계는 이 길을 ‘그림 속’이라고 했고 자신은 ‘그림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옛 선비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되짚어 걷다 보면 어수선한 세상사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단천(丹川)은 단사(丹砂)라고도 불리는 지역으로 온통 붉은 흙의 땅이다. 길도, 밭도, 모래도 붉다. 단천의 건너편은 왕모산이다. 공민왕이 홍건적난때 자신의 어머니를 피신시켰던 곳이다. 이곳에는 공민왕의 어머니를 신으로 모신 왕모당이 있어 매년 정월 보름이면 주민들이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강물이 커다란 소를 이룬 백운지 건너편의 면천은 ‘녀던길’ 최고의 전망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청량산의 기암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면천 전망대에서 강가로 내려오면 퇴락한 흙집 몇 채를 만난다. 사람이 살고있지 않아 보이는 집들이다. 무너져 내리는 지붕 위로 감나무가 주렁주렁 무겁게 열매를 매단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강을 따라가는 오솔길은 경암을 지나고 한속담을 지난다. 자갈을 훑으며 흐르는 물소리와 발밑에서 서걱이는 낙엽소리가 몸 속의 나른함을 일깨운다. 퇴계 오솔길은 가송리 올미재의 농암종택에서 아쉽게도 끝을 맺는다.
안동=글ㆍ사진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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