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 편 쓰기는 일도 아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형태건 언론들은 칼럼을 싣고 있다. 그런데 정치적 의견을 담은 글들은 다들 너무 날이 서있다. 읽다 보면 어딘가를 찔린 것 같아 아프다. 견해가 전혀 다른 글의 가시는 정면으로 날아와 박히므로 상처가 더 크다.
그러니 아무 글이나 한 편 골라 그에 대한 반론만으로도 얼마든지 칼럼을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칼럼에 대한 반칼럼은 또 재반칼럼을 낳을 수도 있겠지만, 그 말들의 홍수 때문에 혼란은 깊어만 간다. 우리 사회는 지금 홍수와 혼란 속에 잠겨 있다.
● 여전한 코드론과 그 확장형들
코드론은 여전하다. 이 정부의 코드를 탓하는 주장은 공격에서 시작하여 공격으로 끝난다. 코드론의 논리는 간단하다. 정권 또는 그 정점에 있는 대통령을 무능의 축 정도로 단정한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선언한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것에 맞는 인물이나 정책은 모두 코드론 비난의 대상이 된다.
코드란 무언가를 열거나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부호 또는 기호다. 정치세계에서 코드란 개혁이든 새로운 정책의 실현이든 집행하는 장으로 들어서는 문턱을 넘는 데 필요한 열쇠다. 코드가 맞아야 그 문을 열고 행동의 마당으로 나갈 수 있다.
일단 그 마당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옳다. 인사 검증의 목적은 달리 있긴 하지만, 특별한 하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코드가 같다고 비난하는 일은 헐뜯기에 불과하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만약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을 중용하라면, 집행의 문을 열기 전에 서로 삐걱거리며 토론만 하다 그만 두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정부 비난의 다른 논리도 코드론의 확장형이다. 국익론도 그 중의 하나다. 모든 게 국익론으로 귀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주장엔 두 가지 의문이 있다. 지금 정부는 국익을 별로 중요한 가치로 여기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국익의 계산이나 이해 방식이 조금씩 다른 것일까. 또 정말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국익에는 경제적 이익만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국가적 명예나 국민적 자긍심도 함께 고려돼야 합당한가. 무조건 자기 주장만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편향된 사고가 팽배해 있다는 느낌이다. 미국과 사소한 마찰만 보여도 반국익이라 외치는 소리도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과는 싸우지 않고 적극 협력하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일까. 마음에 들지 않는 정책은 무조건 위헌으로 몰아붙이는 일도 지나치다. 이번 정권은 쓰러지도록 뭇매를 맞아야 마땅하다면서 임기가 종료될 때까지 협조를 거부하는 일이 장차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할 말이 없다.
최근의 신공안론도 마찬가지다. 간첩 행위 혐의자에 대한 합리적 의심만 제기해도 가만두지 않을 기세의 위력은 폭력적이다. 그래도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국정원에서 이미 십 년간 행적을 지켜 보았다면 왜 지금 터뜨리는가. 그들의 행적이 북핵과 관련이라도 있는 것처럼 어수선하다.
그리고 그 행위가 진정 우리 질서에 위협이 된다면, 미리 경고하고 예방할 일이지 왜 그토록 방치하고 방조하다 지금 체포하는가. 간첩 공작이니 간첩단이니 하는 표현은 역시 국가보안법의 위력을 말해 줄 뿐이다.
● 비판은 합리적, 설득력 있게
이 정부의 실정은 실정이다. 일부는 자인하고도 있다. 그렇다면 호의적이든 비판적이든, 정부 바깥의 정치인이나 전문가나 국민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정부의 밖에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비판이다. 감시와 비판이 격정에 치우쳐 왜곡된 힘으로 드러나면, 훗날 그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뚜렷이 양분된 기운은 언제 완화될 수 있을까 조심스럽다. 집착과 미움, 고집과 훼방, 오만과 무시가 끊임없이 교착하는 현장이 우리 정치의 오늘이다. 코드와 반코드 논쟁은 중단해야 한다. 지금으로선 반코드가 코드화하고 있다는 현상에 주의해야 한다.
차병직 변호사ㆍ참여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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