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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정치논평] 우연적 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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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정치논평] 우연적 필연

입력
2006.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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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전 대통령이 영면했다. 그의 죽음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 그러나 고위공직자, 특히 대통령으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는 유신의 마지막 국무총리로 박정희 암살에 의해 얼떨결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전두환 일당의 12ㆍ12 군사쿠데타와 1980년 광주학살, 그리고 신군부의 집권을 막지 못하는 역사적 죄를 저질렀다. 이는 최 전 대통령의 스타일을 고려하면 어쩌면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결과였는지 모른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무소신

최 전 대통령은 격변의 시기에 최고통치자가 되기에는 부적절한 인물이었다. 80년 봄 당시 최 전 대통령의 별명은 ‘용각산 대통령’이었다. 용각산이라는 가루기침약의 선전이 “이 소리도 아닙니다, 저 소리도 아닙니다” 라는 것이었는데 최 전 대통령 역시 이처럼 우유부단하고 무소신이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다. 최 전 대통령이 최소한의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80년 봄의 비극을 막지 못한 자신의 죄를 사죄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광주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200여명의 영혼에 대한 예의로라도, 12ㆍ12와 5ㆍ18 그리고 자신의 대통령 하야 등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데 협조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무소신이라는 소신’을 고수했다.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면 가끔은 우리는 참 운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민주화의 결정적 국면에 운이 없게 민주주의 수호의지와 능력이 없는 유약한 지도자가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최 전 대통령만이 아니다. 4ㆍ19혁명을 통해 학생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장면 전 총리도 마찬가지다. 그는 5ㆍ16쿠데타가 나자 혼자 살아보겠다고 미국수녀원에 숨어들어갔다. 그 결과 쿠데타군을 진압하기 위한 군의 진압작전이 그의 재가를 받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스페인과 대조적이다. 파시시트였던 프랑코는 1936년 합법적으로 집권한 공화주의정권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오랜 내전에서 승리한 뒤 스페인을 철권통치했다.

그러나 75년 그가 죽은 뒤 스페인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추진했다. 위기는 81년 프랑코의 친위세력이었던 보안군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회의중이던 국회를 무장점령함으로써 생겨났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구세주가 나타났다.

왕에 오른 카를로스 1세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쿠데타를 성사시키려면 나를 사살해야 할 것”이라는 비장한 선언을 발표했다. 그 결과 쿠데타는 실패했다. 5ㆍ16쿠데타와 80년 봄에 장면 전 총리와 최규하 전 대통령이 카를로스 1세처럼 행동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참 운이 없다.

●역사의 향방과 지도자의 역할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이는 단순한 운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물론 최 전 대통령은 우연히 79년 박정희 서거 당시 총리직에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또 우리는 80년 봄 당시에 우연히 최 전 대통령이라는 무소신의 최고지도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 비극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79년 당시 최 전 대통령이 총리직에 앉아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최 전 대통령이 총리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몰론 오랜 공직생활에서 보여준 여러 능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80년 봄 보여준 무소신이 아니라 강한 소신을 가진 공직자였다면 총리에 오르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1인 영구독재체제인 유신체제가 필요로 했던 것은 바로 있으나 마나 하고, 그것이 옳건 그르건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무소신의 총리였다. 따라서 우리가 80년 봄 최 전 대통령 같이 무소신의 최고지도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 비극을 막지 못한 것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필연인 ‘우연적 필연’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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