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A. 아마토 지음ㆍ김승욱 옮김 / 작가정신, 568쪽, 2만5,000원.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는 모든 순간은 인류가 처음 두 발로 이 행성을 밀어올린 태고적 사건의 재현으로 숭고하다. 인류 문명은 직립에서 비롯했으며, 직립보행으로 손이 해방됐고 성대가 열려 언어가 생겼으며 뇌가 커졌다는 것이 고고인류학계의 정설이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태초에 발이 있었다”고 했다지 않는가.
미국 문화인류학자 조지프 아마토의 책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 는 ‘걷기’를 문명과 역사의 율동으로 떠받친다. 책은 걷기가 내포한 다양하고 고유한 시대적 문화적 특징과 의미를 통시적으로 전한다. 걷기,>
“걷기는 곧 말하기”라는 저자의 말처럼, 걸음걸이는 원초적인 몸짓 언어다. 관록의 신발 장인이 구두만 보고도 주인의 직업과 성격을 안다고 할 때, 미 국방성이 인공위성으로 걷기의 고유성을 분석해 ‘대테러 전쟁’ 자료로 쓴다고 할 때, 우리는 걸음을 달리 보게 된다.
찰리 채플린의 저 요상야릇한 걸음은 어떤가. 엉덩이로 추진되는 듯한 무성영화 속 그의 걸음은, 그 자체로, 포드시스템에 의해 자동화ㆍ기계화한 노동자의 걸음, 독재자들이 조직화한 행진 보행 등 정치ㆍ사회적으로 조직화한 당대의 ‘걸음’ 전체에 대한 조롱이고 풍자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걸을 수밖에 없어 걷는 자’와 ‘걷고 싶어서 걷는 자’의 갈등과 투쟁으로 점철돼 왔다. 저자는 자신의 이 ‘걷기의 계급론’을 프랑스 대혁명과 68혁명 등 역사적 순간의 장면들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전개한다.
걷기의 문화사도 있다. 토머스 아퀴나스의 1만4,000㎞에 이르는 유럽 방랑여행, 르네상스 지성의 첫 자리에 드는 논쟁적 철학자 아벨라르의 행로 등은 “중세의 지적 활동이 주로 떠돌아다니는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대변한다. 18세기 궁정 귀족들이 자신들의 신분적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연출했던 ‘의식화된 걸음걸이’, 19세기 낭만주의 시인들의 궁정과 도시의 속박을 벗어난 ‘미학적 방랑 혹은 시적인 보행’도 있다. 20세기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폴 발레리는 “(걷기가) 세상, 정신, 몸 사이에 존재하는 삼각관계를 다시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단언했다.(209쪽)
물론 이 선택적 보행족들의 걸음은 생존을 위한 걸음과는 다르다. 그들에게는 ‘바퀴’가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필 고티에가 말했다는 “(마차의 발판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과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 사이의 하이픈”이었고, 이 계급 역사의 ‘하이픈’은, 1866년 파리박람회에 독일인 니콜라우스 오토가 휘발유 엔진 자동차를 전시하면서부터 점차 지워지기 시작한다. 저자는 자동차의 대중화가 말과 마차의 귀족뿐만 아니라 걷는 인류 전체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고 말한다. 걷기가 생산재에서 소비재로 전락한 시대가 낳은 ‘걷기의 종말’ 예감이다.
문명과 문화의 처음을 연 인류의 걸음이, 역설적으로 문명의 덫에 걸려 영원히 멎을 것인가. 저자는 또 한 번의 역설로 말한다. “인류 자체가 없어지지 않는 한, 걷기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무한한 세상의 질서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아무리 많이 늘어나도, 우리의 정신은 자신이 있는 곳을 인식하고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인식하기 위해 마치 용수철처럼 걷기로 회귀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자연스럽게 낼 수 있는 속도와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해온 걷기로 회귀할 것이다.”(460쪽)
책의 끝에 놓인 이 ‘걷기 르네상스’ 전망은, 과학보다는 계몽 편에 기대는 듯하다. SF적 상상력이 전하는 미래의 풍경들도, 그의 이 희망 섞인 전망을 의심케 한다. 하지만, “자아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단도직입적인 방법”에 대한 그의 옹호가 바퀴 위의 문명을 새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게으르게 살 오른 발들이 토해내는 원시 욕망의 신음이 들리는 듯도 하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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