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ㆍ사회적으로 암울했던 1980년대. 당시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깊고 푸른 밤> <고래사냥> 등으로 탈출구를 제공했던 배창호(53) 감독이 <길> 로 5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다. 길> 고래사냥> 깊고>
<길> 은 아내와 친구의 부정(不貞) 때문에 집을 떠나 20년간 방랑의 길을 걸어야 했던 장돌뱅이 대장장이 태석의 기구한 삶을 담고 있다. 1950년대와 70년대 전라도의 옛 풍경을 바탕으로 우직한 사랑과 우정과 용서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지난해 제14회 필라델피아영화제서 최우수 영화상을 받았다. 길>
제작비는 단돈 5억원. 영화진흥위원회가 파악한 지난해 한국영화 평균제작비(39억9,000만원)의 8분의 1에 불과한 저예산 독립영화다. 2004년 완성됐지만 2년을 기다려 11월2일 개봉한다.
“이런 영화는 열정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애초부터 배급의 어려움은 각오했습니다. 오히려 요즘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으니 잘 됐다는 생각도 들어요.”
“정상적인 충무로 시스템으로 만들면 20억원은 족히 들어야 가능했을 영화”여서 돈은 쪼들렸지만 딱히 힘든 점은 없었다.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 로 감독 자리에 오른 후 20여년간 현장에서 축적해온 노하우가 큰 힘이 됐다. “물질이 감당할 부분을 몸으로 감내해 냈습니다.” 대구 출신인 배 감독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연발하는 주인공 태석 역할도 해냈다. “연출만 하기도 벅찼지만 주인공의 성격과 마음을 제가 가장 잘 이해한다는 생각에 연기까지 했습니다. 전라도 사투리는 어미처리가 미묘한 것이 많아 힘들었어요. 따로 대사 코치를 두고 연습을 했습니다.” 꼬방동네>
그러나 열정만으로 해소되지 않은 아쉬움은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장터 풍경을 좀 더 풍성하게 담지 못했어요. 그 시대 한국인 정서의 원형질을 깊이 있게 담을 수 있는 평범한 이발소와 대폿집, 황톳길 등을 찾기도 쉽지 않았고요.”
대중들의 뇌리에서 많이 잊혀졌고, 그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배 감독은 그 동안 2,3년 간격으로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 왔다. <정> (1999)과 <흑수선> (2001)이 최근작이다. 많은 동년배 감독들이 현장에서 멀어지고 있는 현실과 비교하면 그는 행복한 감독이다. “영화 외에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 집중력과 열정을 한 곳에 모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죠.” 배 감독은 건국대 영화예술학과 교수로서 후학을 지도하는 일과 영화제작 외에는 대외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흑수선> 정>
그는 자신이 독립영화 감독으로만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 “여건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상업영화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닭 잡는 칼 따로 있고, 소 잡는 칼 따로 있듯이 작품 성격에 맞는 제작 시스템에 따라 영화를 만들어 왔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완성도보다는 마케팅과 배급력이 흥행을 좌지우지하고, 작은 영화의 설 자리가 좁아진 요즘 충무로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렸다. 그는 “다양한 영화가 상영되고 이를 즐기는 관객들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면서도 “지금은 그 길을 향한 과도기로 곧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젊은 감독들은 사실적이면서 간결하게 영화를 만든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쓴 소리도 감추지 않았다. “7월에 대종상 심사위원장으로 여러 영화를 봤는데 20년 동안 변하지 않은 점이 있더군요.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관객을 인위적으로 자극하려 음악을 과다하게 사용합니다. 억지스러운 결말도 여전합니다. 이런 점만 개선되면 국제적으로 더 인정 받을 텐데요.”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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