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 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20일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널리 알려진 대구 수성구 경부선 고모역(顧母驛). 동대구역에서 부산방향으로 5.1㎞ 떨어진 이 역에는 한국철도공사 직원 2명만이 열차가 5분 단위로 지날 때마다 다음 역에다 “통과”라고 외치고 있었다. 더 이상 이 역에 정차하는 열차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여일후인 다음달 1일 81년간의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추억 속에 묻힌다.
10평 남짓한 고모역 대합실은 마치 과거로 빨려들어가는 블랙홀 같았다. ‘드르륵’소리가 나는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니 가로 1m 세로 2m 크기의 대형거울과 빛 바랜 산수화와 호랑이 액자가 세월의 깊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어항의 붕어 한 마리와 괘종시계만이 현재를 느낄 수 있는 창구였다.
올 7월부터 고모역에 파견근무중인 한국철도공사 대구지사 장창환(34)씨는 “고모역은 이미 2004년 7월에 여객업무가 중지됐고 올 9월초에는 화물영업도 끝났다”며 “다음달 1일 역 업무를 인근 가천역에 이관한 후 문을 닫는다”고 말했다.
최근 고모역에는 여고생과 사진작가 등 하루에 한 두명만이 추억을 담기 위해 역을 찾고 있다. 8월말 승차권 발매업무도 중지되면서 기차표를 사려는 동네 주민들의 발길도 끊겼다.
고모역은 1925년 11월 1일 간이역으로 출발했다. 공교롭게도 문을 닫는 날이 생일이다. 승객이 증가하면서 1931년 보통역으로 개편됐으며 70년대에는 연 5만4,000여명이 이용할 정도로 붐볐다. 당시 아침에는 주민들이 완행열차로 대구역에서 내려 인근 번개시장과 칠성시장에서 채소를 팔았고, 밤에는 군부대 전세열차에서 내린 신병들을 보기 위해 부모들이 먼 발치에서 발을 구르는 풍경이 일상사였다. 주민들은 “고모역 주변에 군부대가 많아 각종 교육과 훈련을 위한 병력이동이 잦았는데 부모들이 자식 얼굴 한번 보려고 역 인근에서 진을 쳤다”고 회상했다.
고모역은 또 잦은 열차사고로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81년 5월14일에는 부산을 출발, 경산역을 통과한 특급열차가 건널목을 지나던 오토바이와 부딪힌 후 사고처리를 위해 후진하던 중 뒤따라오던 보통급행열차와 충돌, 50여명이 숨지고 240여명이 다쳤다. 또 2003년 8월8일에는 하행선 무궁화호 열차가 고모역 통과직후 정차중인 화물열차를 추돌, 2명이 숨지고 90여명이 다치는 등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91년 9월27일에는 한국일보 사진부 김문호(당시 29세) 기자가 고모령을 취재하다 뒤쪽에서 달려오는 열차에 부딪혀 숨지기도 했다. 지금도 인터불고 호텔 진입로 사거리에는 ‘이곳 경부선 철길은 그가 달려간 마지막 현장이다’고 새겨진 ‘김문호 기자 불망비’가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비와 함께 서있다. 고모역 바로 맞은편에서 ‘고모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최정열(57ㆍ여)씨는 “사고 당일 끓여준 라면이 이 청년의 마지막 식사가 될 줄은 몰랐다”며 “가끔 꽃 한송이에 소주 한잔 올린다”며 안타까워 했다.
박시춘씨가 작곡한 ‘비내리는 고모령’은 해방직후인 46년 가수 현인씨가 불러 국민 애창곡이 됐고, 고모역 앞에는 ’고모역에 가면 옛날 어머니의 눈물이 모여 산다’로 시작하는 박해수 시인의 ‘고모역’ 시비도 보인다.
한국철도공사 대구지사 차경수 영업팀장은 “고모역에서는 창 밖으로 경부선과 대구선을 오가는 열차가 잘 보여 추억을 되새기는 좋은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카페 등으로 민간에 임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대구= 글ㆍ사진 전준호기자 jhj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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