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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름다운 부자 이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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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름다운 부자 이종만

입력
2006.10.24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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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지에 일제강점기 인물들에 관한 글을 연재하다 보니, 유족들의 전화를 받는 경우가 간혹 있다. 내가 쓰는 글이 주로 살인사건, 투기, 스캔들 등 유족 입장에서는 알려져서 결코 이로울 것이 없는 주제인지라, '아무개 씨 딸' 혹은 '아무개 씨 손자'라는 60~70대 노인의 전화를 받으면 솔직히 등골이 오싹하다. 그러나 며칠 전 이종만의 유족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만큼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 27전28기, 성공 후 사회사업 투신

1885년 울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종만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약관의 나이에 지혈제 옥도정기(沃度丁幾ㆍ요오드팅크)의 원료로 사용되는 미역을 매점했다가 러일전쟁이 조기에 종전되는 바람에 처음 실패를 맛본 이후, 이종만은 어업 임업 광업 등 갖가지 사업에 손을 대어보았지만, 손대는 족족 실패했다.

맨손으로 고향에 학교도 세워보았고, 서울에서 고학생 운동도 해보았지만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1937년 쉰세 살의 나이에 '금광왕'에 등극할 때까지 이종만은 33년 간 무려 스물일곱 번이나 실패했다.

이종만은 조선에서 가장 큰 광업회사인 '대동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한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사업을 시작했다. 대동광업에서 해마다 나오는 수백만원대의 이익금을 쏟아부어 교육사업과 문화사업, 자영농 육성사업을 왕성히 전개했다.

자영농 육성을 위해 이종만은 '대동농촌사'라는 재단법인을 세우고 수확물의 7할을 농민이, 3할을 재단이 가지도록 했다. 30년 후에는 농민이 수확물 전부를 가지는 대신 소유권만은 재단이 가지게 했다.

농민에게 소유권을 양도하지 않는 이유는 농민이 일시적 충동으로 토지를 저당 잡히거나 팔아서 다시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재단이 거둔 3할의 소작료는 토지를 늘이는 자금으로 사용했다.

이종만은 그런 식으로 조선 토지를 몽땅 사들여 조선 농민 전체를 자영농으로 만들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왕성한 사회사업을 전개하는 동안, 언론은 '이종만이 더 큰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것은 조선의 크나큰 불행'이라고 극찬했다.

해방 후 이종만은 고심 끝에 자진 월북했다. 자본가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있는 땅을 선택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자진해서 자신을 찾아온 자본가 이종만을 '애국적 기업가'라고 치하했다.

이종만은 제 1,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광업부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77년 아흔세 살을 일기로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이종만은 자진 월북해서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이다.

● '반기업' 푸념 자본가들 귀감 되길

이종만의 막내딸 이남순 여사는 1960년대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 캐나다에 줄곧 거주하다가 두 달 전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고 한다. 이종만의 파란만장한 삶만큼, 북한의 고위인사를 부친으로 둔 여사의 삶 또한 파란만장했으리라.

한국에 반기업적 정서가 심각하다는 자본가들의 푸념을 들을 때마다, 이종만 같은 자본가가 두 명만 있었어도,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한국인의 반감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봉관ㆍ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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