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고려대를 필두로 전국의 문과대학장들이 모두 나서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문학 위기 담론을 터뜨렸다. 좀 학술스럽게 보이지 않는 인문학 주간 행사들과 맞물린 이 행동에서 교수들은 집단으로 성명서를 낭독하고 전국 80개 대학의 문과대학장들은 기자회견 단상에서 집단으로 머리를 숙였다.
사진으로 찍힌 이런 장면을 꼬집으며 사범대의 한 교수분이 농담을 건넸다. "항의도 좀 인문학답게 할 수 없나요?" 그러나 매일매일 '대학 내' 강단 인문학의 조바심나는 분위기 안에 사는 필자로서는 요즘 잘 나가는 사범대 교수분의 농담도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없어 더욱 '인문학스럽지 않은' 표정을 지어야 했다.
● 서울대 입시안, 사교육 배만 불러
여태껏 개인 경험으로 추측하는 정도였지만, 13일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교육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내놓은 자료는 그동안의 추측이 사실임을 확증한다.
서울대의 논술 위주 입시안이 발표된 이후 논술전문학원은 2004년 기준으로 전국 63곳에서 465곳으로 638% 급증했다. 학원 종합반의 논술지도를 감안하면 실제 논술 관련 학원 수는 이보다 훨씬 많다.
학부모들의 논술 사교육비는 최소 월 30만원에서 100만원대까지 급상승하였고, 논술 수요층의 50% 이상은 초등학생이다. 나아가 이제는 외국의 교육기업까지 한국의 논술시장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무차별적 '시장 논리'가 인문학을 필요로 하지 않아 문제라고 문과대 교수들과 학장들이 목청을 높였지만, 수요에 한없이 자비로운 '시장 현실'을 놓고 보면 서울대 입시안 발표 하나로 인문학 수요 위기는 일거에 해소되었다.
나아가 '논술 빅뱅'이라고 표현해야 될 정도의 과열 조짐마저 보인다. 그럼 서울대 입시안은 인문학 위기의 구세주인가? 역시 문제는 그 수요 해결사로 공급되어야 할 품질좋은 논술 지도 교사는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다. 그것도 공교육이 그렇다는 것이다.
전국 교사 5,110명을 대상으로 한 열린우리당 정봉주 의원의 설문조사에서 응답 교사의 71.5%가 '학교에서 논술 대비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같은 당 유기홍 의원의 '전국 인문계고 교사 대상 논술 연수 현황' 조사에서는 교과목에 상관없이 논술 연수를 1시간이라도 받아본 교사가 전체 7만1,791명의 2.9%인 2,088명이었다. 2008학년도에는 22개 대학에서 자연계 논술을 실시할 예정인데 논술 연수를 받은 수학교사는 전국에 384명, 과학교사는 453명뿐이었다.
그나마 연수를 받은 교사의 절반 이상(53%)은 연수시간이 15시간 미만이었다. 학교현장의 "논술 가르칠 교사가 없다"는 아우성을 통계가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형국은 서울대 논술 입시안의 과실을 인문학이 아니라 사교육시장에서 따먹는 판인데, 이대로 가면 전국이 논술판 바다이야기가 되어 공교육이 모두 사교육에 먹힐 기세다.
● '범교과적' 논술교육 어떻게 할 건가
사정이 이런데도 교육부는 논술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철학이나 윤리 교사들을 양성할 준비나 의지는 전혀 없는 듯이 보이고 서울대도 그런 요구를 제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하다.
서울대는 논술을 지렛대로 우수 학생을 거르면 그만이라는 인상이다. 교육부 입장은 논술을 범교과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도덕이나 윤리 과목도 범교과적으로 가르치면 과목 수도 줄이고 좋지 않는가? 그리고 EBS 논술강좌는 왜 열어서 어마어마한 폭리를 취하게 방치하는가? 이 사이에 '글짓기'(composing)와 '글쓰기'(writing)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상당수 논술 기업들이 논술 교육에 목마른 학부모와 학생들의 재정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시키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면 논술 입시안은 당장 철회하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교육부가 그럴 용기나 결단력이 없다면 서울대만큼 무모함이라도 발휘하여 조속한 시일 안에 공교육에 논술 전문가를 투입할 준비에 착수하라. 이것이 강단 인문학의 위기도 해소하고 질낮은 논술 사교육도 예방할 인문학 친화적 시장논리다.
홍윤기ㆍ동국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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