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를 그려내는 것은 색이 아니라 빛이다.
가을에 피어나는 하얀 솜털의 억새꽃은 바람을 그리는 붓이고, 태양빛을 담아내는 팔레트다. 해돋이때 그 뜨거운 붉음을 흠뻑 빨아들였던 억새의 솜털이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한낮의 햇살은 은빛보다 찬란한 빛으로 부숴낸다. 드넓은 억새밭에서 펼쳐지는 빛의 군무에 가을은 눈부신 잔치를 벌이고 있다.
드높은 하늘로 성큼 다가온 가을은 억새와 단풍의 물결로 절정을 치닫고는 수북이 쌓인 낙엽위로 표표히 사라져갈 것이다. 지금은 그 가을의 절정. 한여름 피서철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나들이객이 억새와 단풍 명소를 찾아서 전국을 휘저을 때다.
가을의 대명사인 억새를 찾아 서울서 가까운 경기 포천의 명성산(鳴聲山ㆍ923m)에 올랐다. ‘울음산’이란 이름에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향하다가 이곳에서 설움을 토해놓을 때 산도 같이 울었다고 하고, 궁예가 왕건에 쫓겨 도망치다 이곳에서 산과 함께 울어 이름 붙여졌다고도 한다.
정선의 민둥산이나 장흥의 천관산이 그렇듯 억새를 감상하기 위해선 산을 오르는 수고로움이 필수다. 억새란 것이 맨 바람을 맞는 높은 산 꼭대기 부근에서야 군락을 이루기 때문이다. 명성산 억새군락지로 오르는 가장 편한 길로 코스를 잡았다. 산정호수 주차장에서 비선폭포와 등룡폭포를 지나 오르는 길이다. 산을 에둘러 올라가는 이 길은 경사가 완만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등산로 초입은 바로 비선폭포. 지독한 가을 가뭄에 물이 말라 어린아이 오줌줄기마냥 졸졸거린다. 가을의 진액이 흐르는지 물빛도 탁하다. 물 마른 계곡과 나란히 숲길이 이어진다. 바닥은 곱게 단풍이 들기도 전에 떨어진 나뭇잎으로 벌써 수북하다. 나뭇가지에 아직 붙어 누렇게 말라 오그라든 단풍잎도 안쓰럽다. 다 가뭄 탓이다.
한여름 초록의 터널이었을 등산로에는 반쯤 떨어진 잎 사이로 가을볕이 소담스럽게 떨어지고 있다. 가을 볕에 취해 성큼 내딪는 걸음. 몽글몽글 솟아오른 땀방울은 채 흐르기도 전에 한자락 시원한 바람에 금세 휘발하고 만다.
등룡폭포를 지나 얼마 안가 바로 인근 군 사격장에서 포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산 뒤편이 사격장이다. 뭔 훈련이 있는지 쾅쾅 하늘을 쩡쩡 울리는 포소리에 등산객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마침내 숲터널을 벗어나자 맨 햇살이 쏟아졌다. 눈앞은 온통 은빛의 억새 물결. 천상의 빛이 이런걸까. 명성산 삼각봉 동편 분지 6만평은 온통 억새 뿐이다. 한길을 넘는 억새 속에 파묻혀 가을을 호흡한다. 님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함께 마냥 숨고 싶은 그 곳이다.
억새밭 가운데에 궁예가 마셨다는 궁예약수터가 있고, 능선에는 한눈에 억새군락을 내려다볼 수 있는 팔각정이 있다. 햇빛에 따라 시선에 따라 그 색을 달리하는 억새꽃의 군무를 만끽하고는 하산길을 자인사 코스로 삼았다.
어려운 코스이지만 산정호수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이곳은 깊은 골이라 아직도 짙은 초록의 세상이다. 멀리 산정호수 위로 햇살이 부딪는다. 나무계단에 이어 돌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급경사다. 어질어질한 길을 네발로 기다시피 내려갔다. 하산길인데도 땀이 쏙 빠진다. 1시간 30분을 내려오니 마침내 자인사다. 절 지붕 너머로 명성산의 암봉이 우람하게 지키고 섰다.
● 여행수첩
의정부에서 철원으로 향하는 43번 국도를 타고 포천읍을 지나 문암삼거리에서 우회전 78번 지방도로를 4km 가량 가면 산정호수 주차장이다.
버스는 서울의 수유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신철원이나 동송행 직행버스를 타고 운천에서 하차, 산정호수행 시내버스(20분 간격)를 이용하면 된다.
비선폭포-등룡폭포-억새군락-등룡폭포-비선폭포 코스는 3시간 30분, 비선폭포-등룡폭포-억새군락-자인사 코스는 4시간 가량 걸린다.
20일은 명성산 뒤편의 사격장에서 ‘아시아 디펜스 2006’ 행사가 열려 명성산 산행이 금지된다. 여러 국가에서 참여하는 화력 시범훈련이다.
산정호수 매표소 (031)531-6103, 포천시 문화공보담당관실 (031)538-2067~9
포천=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빛 물결 넘실넘실' 억새 명소
단풍이 빠를까? 억새가 빠를까?. 억새의 부수수한 분위기가 낙엽을 닮아서인지 많은 이들은 단풍이 지난 후에 억새가 절정을 이룰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 억새는 9월 중순부터 꽃을 피워낸다. 단풍보다 일찍 시작해 단풍이 질 때까지 오랜 기간 벌판을 수놓으며 가을을 노래하는 게 억새꽃이다. 찬란한 은빛 축제가 열리는 전국의 억새 명소를 안내한다.
장흥 천관산
천관산(723m)은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변산과 더불어 호남의 5대 명산으로 꼽힌다. 너른 억새 평원을 깎아 세워놓은 것 같은 기암이 둘러싸고 있고, 고개를 돌리면 올망졸망한 섬들이 수다를 떠는 다도해가 쪽빛을 발하고 있다.
천관산 최고의 억새밭은 정상인 연대봉에서 환희대까지 이르는 1km의 주능선. 40만평의 억새밭이 이 능선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펼쳐졌다. 연대봉에 올라 다도해를 바라보며 등산할 때 흠뻑 젖은 땀을 식힌 뒤 억새밭 능선을 걸어 환희대에 도착해 수많은 기암을 몸으로 즐기며 하산하게 된다.
환희대 옆의 구룡봉을 지나 탑산사로 내려오는 길에는 아육왕탑을 지난다. 돌덩어리 5개가 차곡차곡 쌓여 아슬아슬하게 돌탑을 이루고 있다. 인도의 아소카왕이 와서 쌓았다는 전설이 있고, 돌탑 바로 아래 절이 있었는데 맨 위의 바위가 떨어져 그 절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탑산사를 지나 내려오면 천관산 문학공원. 400개 넘는 돌탑과 이청준 한승원 최일남 전상국 등 내로라 하는 문인들의 시와 만나는 공원이다. 장흥군 문화관광과 (061)860-0229
밀양 사자평 고원
억새 군락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다. 재약산(1,189m) 수미봉부터 사자봉 일대의 해발 800m 되는 고원지대 140만평에 억새 장관이 펼쳐진다. 영남 알프스의 한 부분으로 가을이면 전국에서 억새 순례객이 몰려드는 곳이다.
평평한 고원인 이 억새밭은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가 표충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훈련시켰던 곳이고 여ㆍ순 반란사건 때는 빨치산의 집결지 이기도 했다.
사자평으로 오르는 길은 밀양 표충사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길과 쌍폭포를 지나 고사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첫번째 길은 시간을 20~30분 단축시킬 수 있지만 고개가 가파르다. 쌍폭포로 돌아가는 길은 완만한 편. 제법 산행을 즐기고 싶다면 표충사길을 권한다. 표충사에서 홍룡폭고, 고사리 마을을 지나면 정상을 향해 펼쳐지는 억새밭이 시작된다. 억새밭 너머로 멀리 영남 알프스의 우람한 산세가 한층 볼거리를 더한다. 표충사에서 폭포로 이어지는 길가의 옥류동천 주변은 단풍 또한 곱다. 밀양시 문화체육과(055)359-5646
정선 민둥산
정선군 남면의 민둥산(1,118m)은 억새 명소의 대장격. 이름처럼 나무가 없는 민머리 산인데 산의 머리가 벗겨진 이유는 나물 때문이다. 이곳에서 산나물이 많이 났기 때문에 매년 한번씩 불을 질렀다고 한다. 둥그스름한 산 능선을 타고 끝없이 펼쳐진 억새밭은 약 20만평 가량. 투명한 가을 햇살을 받아 산 전체가 은빛 물결에 휩싸인다.
민둥산 억새 산행 기점은 해발 800m 고지의 발구덕 마을. 카르스트 지형으로 지반이 여기 저기 움푹 팬 독특한 형태를 가진 마을이다. 꺼진 구덩이가 8개 라고 ‘팔구뎅이’라 불리다가 발구덕으로 이름이 굳어졌다. 산행은 증산역에서 멀지 않은 증산초등학교 옆에서 시작된다.
증산초등학교에서 민둥산 정상을 거쳐 지억산(1,157m) 능선을 타고 동면의 화암약수 까지 이어진 등산로는 약 15km로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산세도 넉넉하고 길도 뚜렷해 서울에서 당일 산행지로 즐길 수 있는 코스다. 민둥산 억새축제는 이미 지난달 23일부터 시작됐다. 축제는 내달 12일까지 계속 이어진다. 정선군 관광문화과 (033)560-2361
홍성 오서산
오서산(791m)은 서해의 전망대다. 인근 지역에서 가장 높아 천수만과 보령 앞바다를 오가던 크고 작은 배들이 이 산을 바라보고 방향을 잡는다고 해서 ‘등대산’이란 별명도 붙었다. 오서산은 가을산이다. 10월이면 산정에 억새가 피고 산 아래 광천에서는 김장철을 앞두고 새우젓을 사려는 사람들로 성시를 이룬다. 오서산 등산로 초입은 상담마을. 마을에서 30분쯤 오르면 정암사다. 등산로는 정암사를 지나며 본격화하는데 40도가 넘는 경사에 숨이 힘겹다. 8부 능선에 올라서면 오서산 산행의 재미가 시작된다. 서해의 확 트이는 시야가 발걸음에 힘을 실어준다.
억새밭은 9부 능선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정자 오서정부터 정상으로 이어지는 2km되는 길목에 억새가 흩어져 있다. 오서산의 억새는 빼곡하지 않다.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억새만으로는 초라하지만 해넘이와 어우러진 모습은 여느 억새평원의 감동 그 이상이다. 홍성군 문화관광과 (041)630-1224
제주 마라도
마라도는 아이들이 그린 동네그림 같은 섬이다. 학교 하나, 교회 하나, 보건소 하나? 9만여 평으로 어지간한 대학 캠퍼스보다 작다. 여름에는 녹색 바탕의 동화(童畵)이지만 가을로 들어서면 갈색으로 바탕색이 바뀐다. 그리고 풍경이 나이를 먹는다. 섬 전체가 바람에 백발을 흩날리는 듯한 억새섬이 된다. 한라산의 단풍과 오름의 억새를 보기 위해 제주도행을 했다면 마라도행을 계획에 추가하자. 산행이 아닌 배를 타고 가서 맞는 억새. 감흥이 사뭇 다르다.
마라도 답사의 일반적인 방법은 섬 주위를 두르고 있는 일주도로를 한 바퀴 도는 것이다. 일주도로 안의 타원형 언덕이 모두 하얀 억새밭이다. 보는 곳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다. 보건소 쪽에서 보면 하얀 하늘과 등대, 교회를 바탕으로 억새 언덕이 보이고, 등대 쪽에서 보면 쪽빛 바다를 배경으로 하얀 억새가 흔들린다. 억새밭 한가운데에 서면 멀리 한라산 정상과 산방산이 억새 뒤편으로 다가온다. 마라도행 유람선 출발지인 송악산선착장이 있는 송악산도 해변 억새의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대정읍사무소(064)794-2302 마라도여행정보 www.marado-tour.co.kr
권오현기자 koh@hk.co.kr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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