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무라 마사노리(中村政則) 지음ㆍ유재연 이종욱 옮김 / 논형 발행ㆍ1만5,000원
1953년 11월 방일 중이던 미국 닉슨 부통령은 어떤 연설에서 “(일본)헌법 9조는 미국의 실수였다”고 말한다. 이듬 해 일본 방위청이 발족하고, 육해공 3개 자위대가 출범한다. 1992년 평화유지(PKO)법안, 2003년의 유사법제에 이르는 일본 평화헌법의 과거회귀는 50여 년 전 닉슨의 그 한 마디에서 예견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 헌법의 퇴행, 다시 말해 일본 국가 체제 파행의 배경에는 늘 전쟁이 있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중동전과 최근의 이라크 전쟁까지.
일본의 진보 경제사학자 마사노리는 자문한다. 전후 60년(2005년 기준), 일본의 ‘전후’(戰後)는 끝났는가? 그의 책 ‘일본 전후사 1945~2005’는 일본의 전후를 끝내고자 열망하는 지성의 눈으로 일본 전후 60년을, ‘관전사’(貫戰史)라는 독특한 길을 따라 고찰한 책이다.
패전과 함께 시작된 연합국총사령부(GHQ)의 포괄적 점령정책, 성공적이었던 농지개혁과 재벌 해체, ‘상징 천황’과 ‘전쟁 포기’를 못 박은 신(평화)헌법의 제정 등 순항하던 전후 일본 민주화는 헌법 시행 3년째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적신호가 켜진다. ‘레드 퍼지’(red purgeㆍ적색분자추방)의 광풍과 재군비(경찰예비대창설)가 시작된 것이다. 제국 일본군의 군비와 인력을 계승한 자위대도 출범한다. 저자는 일본의 민주주의가 태생적으로 ‘냉전 민주주의’였으며, 미국의 통치 편의를 위해 천황에게 면죄부를 줌으로써 “일본 정신사에 헤아릴 수 없는 마이너스 영향”을 끼친 ‘천황제 민주주의’라고 비판한다.
이케다 내각(1960)의 국민소득 배증계획으로 시작된 일본 60년대의 고도성장 신화는 베트남 전쟁과 궤를 함께 한다. 전쟁 특수에 따른 대미 수출 흑자 전환과 공해병 등 사회적 문제들이 노정된 시기이기도 하다. 1차 석유파동(73)과 오일쇼크, 경제 거품의 붕괴와 장기 불황의 늪으로 빠져든 3기의 일본. 그리고 자위대의 해외 파병과 헌법9조의 평화정신 기조가 무너진 4기(1990~현재).
저자는 일본이 미국의 세계전략과 미국 중심 전쟁의 영향력 바깥에서 홀로 서지 못했고, 그 결과 “일본의 전후는 끝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자립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아시아에 대한 진정한 과거 청산과 헌법 9조를 지켜내지 못하는 한 전후 청산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역사가는 그 시대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거꾸로 새로운 사태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했던 이탈리아 역사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쇼와 천황의 종전조서를 라디오로 듣던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이래 경험한 일본 전후사의 구비들을 기억과 증언 등을 통해 새롭게 바라본다. 그 궤적은 의도했던 안 했든, 한반도의 현대사, 동아시아 및 현대 세계사와 겹치며 이어진다. 책은 우리에게 암시적으로 묻는다. ‘과연 우리의 종전은 끝났는가?’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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