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자이너 모놀로그'(이브 앤슬러 원작)라는 연극의 원작 제목에 보이는, 그리고 한국어 공연 제목에도 그대로 차용한 영어 단어 '버자이너'는, 한국어 공연에서 번역돼 배우 입에서 발설된 단어('ㅂ'라고 하자)와 같은 값을 지니고 있지 않다. 두 말이 가리키는 신체 부위도 포개지지 않지만, 무엇보다 정서적 울림이 크게 다르다.
미국인 의사라면 환자 앞이나 세미나에서 '버자이너'라는 말을 꺼낼 수도 있겠지만, 한국인 의사가 그런 자리에서 'ㅂ'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는 없다. 'ㅂ'가 한국어 사용자에게 행사하는 정서적 환기력이, '버자이너'가 영어 사용자에게 행사하는 정서적 환기력보다 훨씬 격렬하기 때문이다.
● 욕설의 일상화가 금기 해체인가
본디 '칼집'을 가리켰던 라틴어 '바기나'에서 온 '버자이너'는, 그 뜻에서나 정서적 울림에서나, 한자어 '질(膣)'에 가깝다. 'ㅂ'가 한국어에서 전형적 금기어인 데 비해, '버자이너'는 영어에서 금기의 정도가 'ㅂ'보다 현저히 약하다. 가리키는 부위도 다르고 정서적 울림도 다른 '버자이너'를 'ㅂ'로 옮긴 것은 그러므로 (아마 의도된) 오역이다.
성기 이름은, 성행위나 배변 등과 관련된 말과 함께, 많은 자연언어에서 금기어에 속한다. 그것은 욕설에나 사용될 뿐 여느 자리에선 에둘러 표현되는 것이 예사다. 많은 문화권에서 이런 행위나 신체 부위를 은밀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테다. 20세기 영어권의 어떤 세대는 이런 금기를 해체하는 것이 인간 해방에 기여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 젊은이들은 성행위나 배변과 관련된 소위 '4자 속어(four-letter words)'를 과감히 사용했다. 예컨대 fuck, shit, cock, cunt, piss, dick 같은 말들이다. 전형적인 욕설이 우연히 네 글자였던 스페인어권(puta: '갈보')에도 '4자어'라는 표현이 퍼졌고, 영어의 shit('똥')에 해당하는 표현이 merde인 프랑스어권에서는 '5자어'라는 표현이 생겼다.
이런 '4자어'나 '5자어'를 공중 앞에서 당당히 사용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인간해방투쟁이었다. 금기어라는 것은 일종의 억압이므로, 말을 해방시킴으로써 의식을 해방시키겠다는 이들의 생각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금기어의 공민권 회복을 통한 욕설의 일상화는 '중독'의 징표일 수도 있다. 그런 욕설에 한번 맛을 들이면, 욕설 없이는 말을 못하게 되고 욕설의 강도가 점점 세져야 직성이 풀린다.
욕설이든 포르노그래피든 도박이든 약물이든, 모든 중독은 해롭다. 그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중독은 또 다른 억압인 것이다. 금기의 극단적 해체는 인간 정신의 해방에 기여한다기보다 해리(解離)에 기여한다.
나는 금기라는 것이, 부분적으로는,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기품과 관련돼 있다고 믿는다. 꼭 비윤리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혼자서나 단둘이 은밀히 해야 할 일이 있다. 배변도 그렇고, 섹스도 그렇고, 코 후비는 일도 그렇다. 그것이 인류 문화와 문명의 지금 단계가 인류에게 추천하는 방식이다.
물론 역사의 어떤 단계엔 그런 일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절도 있었고, 지금도 어떤 문화권에서는 그렇다. 또 문화와 문명의 한 측면이 억압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억압을 해체한답시고 제 '사생활'을 꼭 만천하에 공개해야 할까?
● 언어해방에도 기품이 있어야
한때는 사적인 자리에서나 할 수 있었을 금기어가 공석(公席)의 국회의원 입에서도 나오고, 심지어 신문에까지 활자화되는 시대가 되었다. 이 난만한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그런 입을 강제로 막자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일제 때의 독립투사라도 되는 표정으로 그런 '언어해방운동'을 벌이는 자들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사람들 모아놓고 제 코를 후비거나 배변을 하는 것 같아 불쾌하다. 그것은 해방된 자가 아니라 중독된 자의 모습, 정신이 풀려나간(解離) 자의 모습이다. 내가 점점 보수주의자가 돼 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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