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 글’이라는 신문기자들의 자조(自嘲)에서도 드러나듯, 신문기사의 생명력은 길지 않다. 흔히 스트레이트 기사라 부르는 보도 기사만이 아니라, 사설이나 칼럼이나 해설 같은 논평기사도 한가지다.
어떤 형식의 기사든 거기엔 시의성(時宜性)이 담겨 있게 마련이고, 글에 생채(生彩)를 주는 그 시의성이라는 원기소가 글의 수명을 줄이는 독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사는 쓰여지는 순간에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 뜨거운 글이지만, 일단 쓰여지고 나서는 훨씬 빨리 식어버리는 글이다. 그래서, 신문에서 읽을 땐 매혹적으로 보였던 칼럼도 나중에 책으로 묶인 뒤 읽어보면 밍밍해 보이기 십상이다. 시간의 더께로 흐릿해지다 못해 부식된 기사들을 꼼꼼히 읽는 독자는 역사학자들뿐일 것이다.
그래도, 낡아버리는 속도에서 모든 기사들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단정한 문체와 곧은 논리로 당대 현실을 정직하게 응시한 기사들은 얼마쯤의 세월이 흐른 뒤 읽어도 낡은 느낌이 덜하다. 홍승면(1927~1983)의 기사들이 그 예다. 그가 작고하고 다섯 해 뒤에 나온 ‘잃어버린 혁명’과 ‘화이부동(和而不同)’은 거기 묶인 기사들이 쓰여졌을 때의 온기를 꽤 보존하고 있다. 그 책들이 나온 지 스무 해 가까이 되고 거기 실린 글 가운덴 반세기 전 것도 있지만, ‘잃어버린 혁명’과 ‘화이부동’은 지금도 읽을 만하다.
홍승면은 언론계에서 ‘출세’가 매우 빨랐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49년 합동통신사 기자로 언론계에 뛰어든 그는 6.25 동란 중 통역장교로 복무한 뒤 1955년 한국일보사에 들어가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지냈고, 1962년 동아일보사로 자리를 옮겨 역시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지냈다. 홍승면이 한국일보 편집국장이 된 것이 31세 때였으니, 그 시절 신문사 편집 책임자의 평균 연령이 지금보다 썩 낮았다는 점을 고려해도 파격이었던 셈이다.
신문기사를 그 형식에 따라 크게 보도와 논평으로 가를 수 있다면, 홍승면의 기사는 주로 논평에 속했다. 젊은 나이에 편집 간부와 논설위원이 되는 바람에 사건 현장에 붙박여 있을 기회가 별로 없었던 탓이다.
‘잃어버린 혁명’은 비교적 짧은 신문 칼럼 모음이다. 홍승면이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서 이 신문의 고정란 ‘지평선’과 ‘메아리’에 쓴 글들,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서 그 신문의 고정란 ‘횡설수설’에 쓴 글들, 그리고 현직을 떠난 뒤 경향신문의 ‘정동탑’ 난에 쓴 글들 가운데서 추려 묶었다. 특히 ‘지평선’에 쓴 칼럼들은 반세기 전 글인데도 낡았다는 느낌을 거의 주지 않는 것이 야릇하다. 그것은, 신문 기자 출신 언론학자 최정호가 그의 기사 문장을 두고 ‘누벨 바그’니 ‘뉴 저널리즘’이니 하고 평했듯, 홍승면 문장의 두드러진 현대감각 덕분일 것이다.
최정호는 홍승면의 문장을 한국 최초의 ‘구어의 글’ ‘대화의 문체’라 평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라는 말은 덕담의 맥락에서 나온 과장이겠으나, 기사 문장이든 소설 문장이든 1950년까지도 대체로 어수선하고 흔히 장식적이었던 한국어 산문 문장들 속에서 홍승면 문장의 깔끔한 현대성이 눈밝은 독자들에게 들키지 않을 도리는 없었을 테다.
조금 긴 글들을 모은 ‘화이부동’에는 ‘신문문장 문답’이라는 글이 있다. 후배 기자가 묻고 선배 기자가 답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이 글에서, 틀림없이 홍승면 자신을 투영하고 있을 선배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신문문장이라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의미가 명쾌해야 해. 그것을 신문의 친절이라고 누가 그러더군.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이 신문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독자들에게 명쾌하게 커뮤니케이트되어야 한다는 데 신문문장의 생명이 있지. 신문문장은 퀴즈가 아냐. 기술론으로서의 신문문장론도 어떻게 하면 독자들에게 명쾌하게 커뮤니케이트하느냐 하는 기술론 아냐?”, “신문은 국민을 교도하거나 조직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계몽적’이라는 말이 나는 싫어. 무지 ‘몽매’한 국민을 ‘계발’한다는 말인가. 국민(독자)의 지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돼요. 그러나 한편 국민(독자)의 정보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되지. 따라서 우리는 친절하게 기사를 써야 한다는 거야. 그것이 계몽이 아니라 봉사란 말이야. 국민(독자)의 지성과 국민(독자)의 정보를 구별해서 생각해야 해.”
‘화이부동’의 마지막 글인 ‘신문기자 최병우’를 읽어보면, 독자의 지성을 과소평가하지 말되 독자의 정보를 과대평가하지도 말자는 홍승면의 좌우명은 선배 기자 최병우의 그늘 아래 세워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홍승면은 ‘직업으로서의 신문기자’라는 글에서, 국민과 신문기자의 관계를 사령관과 참모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했다. “참모들은 사실을 정확하게 보고해야 하고 사태 전망을 적절하게 판단해야 하고 현명한 행동을 건의해야 한다. 그것은 사령관을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사령관이 옳은 결정을 내리도록 봉사하는 것이다.”
홍승면의 칼럼들은 대체로 이런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신문문장론과 기자의 참모기능론 위에서 그 단정한 기품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 전에 쓰여진 홍승면의 신문 글들이 지금도 읽을 만한 것은 그 문체의 힘 때문만이 아니다. 홍승면 글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그 칼럼들이 쓰여지던 상황을 응시하는 필자의 정직과 양식의 힘에 있다. 제1공화국 끝머리에 칼럼니스트가 된 홍승면은 민주주의의 개화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다시 말해 그는 현직 언론인으로서든 객원 칼럼니스트로서든, 양식을 지니고서는 자신의 글에서 정치적 긴장을 제거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 정치적 긴장을 감내했다. 예컨대 4ㆍ19 당일 ‘지평선’ 난에 쓴 ‘아, 슬프다 4월 19일’이 “눈물이 앞서고 손은 떨려서 무슨 말을 써야 좋을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거듭하며 홍승면 글로서는 드물게 격한 정서를 드러내고 있거니와, 그의 칼럼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어두운 순간들에 이성의 빛을 들이대며 궁핍한 시대의 양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어떤 독자들은 그의 칼럼들이 충분히 날카롭거나 당당하지 못했다고 투덜댈지도 모른다. 사실 이승만이 됐든 박정희가 됐든, 홍승면의 칼럼이 현직의 철권 통치자를 곧바로 지목해 비판한 적은 없다. 그의 말화살은 그 독재자들의 하수인이나 소위 ‘2인자’, 또는 에둘러서 제도를 겨냥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것은 언론인 홍승면의 한계였다기보다 유사파쇼체제 제도언론의 한계였다. 홍승면은 젊어서나 나이 들어서나 당대 제도언론이 수용할 수 있는 양식의 첨단을 견지했다. 그것은 온건하지만 어기찬 보수적 자유주의자의 양식이었다.
반란군의 검열로 군데군데 삭제된 1961년 5.16 당일의 ‘메아리’ 칼럼에서 그는 “동기가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시민들이 쿠데타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쿠데타에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는 데 법치국가 시민들의 양식이 있고 쿠데타 지도자가 곰곰이 생각할 문제점이 있는 것 같다”고 썼고, 공포 분위기에서 치러진 1975년 유신체제 찬반 국민투표를 앞두고는 ‘횡설수설’ 난에서 “현행 국민투표법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정확하게 반영케 하기에는 독소 조항들이 너무나 많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소위 보수 진영에서는 이 정도의 양식을 지닌 저널리스트를 찾기 어렵다.
홍승면의 칼럼들이 죄다 정치를 소재로 삼은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혁명’에는 지금부터 40년 전에 이미 유행했던 ‘노랑머리’에 대한 단상에서부터 사모님 호칭의 인플레, 실업과 자살, 폭력 교사, 이런저런 범죄들에 대한 소감 같은 것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은 1950년대 말부터 1970년까지의 세태를 읽는 것이고, 그 연대의 미시 사회사를 읽는 것이기도 하다. 그 글들을 읽다보면, 정치적 자유 획득과 경제성장이라는 그간의 큰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는 거의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독자는 문득 문득 기시감(旣視感)으로 어질어질하다.
홍승면의 저서로는 ‘잃어버린 혁명’과 ‘화이부동’말고 ‘프라하의 가을’(1977)과 ‘백미백상(百味百想)’(1984)이 있다. 수필집 ‘프라하의 가을’은 홍승면이 생전에 낸 유일한 저서로, 이 책의 글 몇 편은 ‘잃어버린 혁명’과 ‘화이부동’에 옮겨졌다. ‘맛의 고향, 맛의 내력’이라는 부제를 단 ‘백미백상’은 홍승면이 언론계를 떠난 뒤 ‘주부생활’에 연재한, 음식에 관한 글을 모은 책이다. 식도락가라는 말이 폄훼가 아니라면, ‘백미백상’은 한국인 식도락가가 쓴 최고의 음식 비평서다.
음식을 철별로 나누어 한 챕터씩 묶은 이 책의 글들은 그 편편이, 그 문장 문장이 독자의 식욕을 자극해 입맛을 다시게 한다. ‘백미백상’의 맛은 그 음식들의 맛이기도 하고 홍승면 문장의 맛이기도 하다. 아니, 독자로 하여금 침을 꿀꺽 삼키게 하는 것은 그 두 맛의 어우러짐이다..
홍승면은 사회학과를 졸업했으나 학부에 진입할 때는 심리학과 학생이었고 그 전에는 문학과 철학에도 뜻을 두었다. 또 언론계에 들어간 뒤의 짧은 미국 유학 동안에는 신문학을 공부했고 언론계 생활 후반에는 국제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이런 사연들을 털어놓은 ‘자유인이고자 걸어온 도정’이라는 글에서 홍승면은 이렇게 말했다.
“누가 나에게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저널리스트입니다’라고 대답해 왔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나의 전공은 인간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이 도사려 있다.” 그러니까 자유주의자 홍승면의 저널리즘은 인간학이고 휴머니즘이었다. 그의 생각으론 저널리즘이야말로 인문 정신의 집적이었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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