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 실험이 한반도 정세에 미칠 심각한 파장에도 불구하고 북핵 얘기를 하기가 솔직히 지겹다. 어리석고 무모하다는 북한의 핵 게임이 우리 자신의 안전을 해칠 위험에 둔감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잊을 만하면 한층 악화한 위험을 일깨우는 상황이 10여년 넘게 지속되는 것이 마치 오래 시달린 고질처럼 사람을 지치게 한다.
● 북핵 위협보다 사회 갈등이 고질
그런 병환을 친구로 삼은 어느 시인의 경지에 이르기는 어려운 일이고 보면, 스스로 병을 치유하지는 못하더라도 증상을 완화하는 방법이나마 열심히 찾는 게 좋겠다.
이제는 위태로운 중환으로 여기는 북핵 문제를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대 초 오스트리아 빈에서다. 독일통일의 유별난 감동과 교훈을 전하겠다고 베를린에 몰린 한국언론 특파원들은 북핵 문제가 불거진 뒤 빈의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진행된 북핵 논의 취재가 훨씬 중요한 일이 됐다.
냉전 대치 속에 북한의 온갖 위협에 익숙한 한국 사회지만 핵 위협은 전혀 차원이 달랐다. 통일 열기에 들떴던 사회는 성급한 통일비용 걱정에 이어 북핵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그토록 염원한다고 외치던 통일과업은 잊다시피 했다.
그런데 이 즈음 이미 우리 사회는 기묘한 증상을 보였다. 비록 엉겁결에 지르는 비명이지만 병의 근원을 찾는 데는 소홀한 채 사악한 북한을 욕하기에 급급했다. 또 더러 북한이 엄혹한 생존위기를 벗어날 탈출구를 열어줘야 한다는 온건론이 제기되면 에워싸고 몰매 주기에 바빴다.
그렇게 우리끼리 다투느라 북한과 미국이 벌이는 핵 게임의 변전에는 늘 한발 뒤졌다. 보수여론이 터무니없다고 일축한 북한의 주한미군 핵 철수 주장을 미국이 수용한 것이 단적인 예다.
94년 북폭 위기를 거쳐 남북 정상회담을 경험하면서 수그러졌던 증상은 미국의 정책 변화와 함께 되살아 났고, 지난 교훈마저 잊은 모습이다. 흉악한 북한을 감싼 정부의 그릇된 정책이 병을 악화시켰다고 삿대질하는 이가 늘었다.
뭉뚱그려 북핵 신드롬으로 부를만한 이런 증상들은 북한의 현란한 핵 게임에 넌더리가 난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또 정부가 북핵 문제의 근본적 딜레마를 국민이 널리 인식하도록 설득하는 데 실패, 그야말로 무모하고 어리석은 선택에 집착하는 것처럼 비친 탓이 크다.
그러나 중병을 앓는 환자끼리 서로 네 탓이라고 멱살잡이 하는 것과 같은 북핵 신드롬은 병의 근본, 북핵 문제의 본질을 애써 외면한 데서 비롯된다. 북한의 핵 개발 명분은 미국이 체제존립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또 체제안전을 보장하면 핵 계획을 포기하겠다는 협상조건을 버리지 않고 있다. 따라서 북핵 줄다리기는 북ㆍ미의 전략적 선택에 좌우될 수 밖에 없고 지금껏 그 틀에서 움직이고 있다. 6자 회담은 애초 위선적 외교 무대에 불과하고, 중국의 중재 등도 주변 요소일 뿐이라는 분석이 미국 내에서도 유력했다.
북핵 게임이 핵 실험에 이른 지금 부시 행정부의 강경책이 핵 확산을 초래했다고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이게 당초 미국이 바란 구도라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을 잘 헤아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끼리 물고 뜯느라 정작 북핵 문제와 한반도 정세가 어디로 흘러가는 지는 모르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 불안해소 전망 올바로 헤아려야
물론 난해한 국제정치 게임에 우리사회의 이념적 갈등이 덧붙어 나타나는 북핵 신드롬을 치유하거나 완화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쓸데 없이 기력을 쏟기보다는 어차피 역사의 뒤안길로 먼저 퇴장할 북한과 정부를 욕하는 것이 이 땅에서 무난하게 잘 사는 처세의 지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나깨나 국가 안위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한다는 사회 중심 세력들이 늘 강한 외세가 이끄는 방향으로 앞장 서 달려가는 모습은 보기 처량하다.
그렇게 해서 북핵 위협과 불안에서 머지않아 벗어날 전망이 뚜렷하다면 그런대로 용인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냉전 대치의 역사적 경험에 비춰 그런 기대는 헛되기 마련이다. 북한이 붕괴하기에 앞서 우리사회가 얼마나 오랫동안 시대착오적인 신드롬에 시달려야 할지를 내다보는 안목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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