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는 지난해 말 실험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 이공계 단과대학에 연구노트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하지만 이 연구노트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노트에 연구자 외의 제3자가 증인으로서 서명하는 공란이 없기 때문이다. 특허분쟁 등이 일어날 경우 연구노트는 핵심 증거가 될 수 있지만 증인의 서명과 날짜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아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세계 각국이 연구노트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프랑스 과학기술부와 특허청은 올해 연구기관에 연구노트와 작성 가이드라인을 보급했다. 영국의 대표적인 지적재산권 라이센싱 기업인 브리티시 테크놀로지 그룹(BTG)은 1996년 제정한 연구노트 가이드라인을 올해 개정, 배포했다. 우리나라 특허청도 올해 시범사업에 착수, 연구노트를 보급하고 작성법을 가르치고 있다.
●특허권리 시작은 연구노트
연구노트는 실험실 내에서 연구 노하우를 공유 전수하는 기초적인 지식의 축적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연구노트는 특허나 논문의 선취권을 주장하는 핵심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특허를 먼저 출원했느냐(선출원주의)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먼저 냈느냐(선발명주의)에 따라 특허권을 인정하는 미국에서는 연구노트가 심심찮게 법정에 등장한다.
미국 제약사인 애보트와 카이론은 에이즈 바이러스(HIV) 검출방법 특허를 놓고 맞붙은 적이 있다. 카이론은 “애보트사가 우리 특허를 침해했다”고 침해소송을 제기했고, 애보트는 거꾸로 카이론을 상대로 “우리가 먼저 발명했으므로 카이론의 특허는 무효”라며 소송을 냈다. 카이론은 연구자의 노트가 없어 불리한 입장에 처했다.
반면 애보트는 큰 소리를 치며 연구자의 노트를 제출했지만 안타깝게도 연구노트를 꼼꼼하게 작성하지 않아 선발명을 입증할 수 없었다. 결국 애보트는 무효소송에서 패했다.
지난해 말 논란이 됐던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팀의 줄기세포 특허권 문제에서도 연구노트가 주목을 끌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공동연구자인 제럴드 섀튼 미국 피츠버그대 교수가 황 박사팀의 노하우를 도용해 특허를 출원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지식재산연구원 김승군 연구위원은 “이 같은 분쟁은 소송을 통해서만 가릴 수 있고 이 때 가장 중요한 증거는 연구노트”라며 “황 박사팀이 도용을 문제삼더라도 사실상 연구노트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아 입증할 길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노트 없으면 라이센스계약 꺼려
우리나라 특허제도는 선출원주의지만 연구노트는 매우 중요하다. 특허법인 태평양의 이은경 변리사는 “미국 특허를 내려는 연구자는 물론 국내에서도 선사용권을 가릴 때 연구노트가 증거로 채택된다”고 말했다. 즉 기업이 특정 기술을 제품화할 때 특허출원이 늦었더라도 연구노트에서 선발명을 입증할 수 있다면 제품화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또 외국 기업들은 라이센스 계약을 맺기 위해 연구기관을 실사할 때 반드시 연구노트를 요구한다. 연구자들이 아무리 좋은 논문을 쓰고 특허를 출원해도 실험기록이 없거나 부실하면 기업들은 자연히 계약을 꺼리게 된다. 한국기술연구원(KAIST) 바이오시스템학과 조영호 교수는 미국 대학에서 이 사실을 경험한 후 학생이 졸업하면 연구노트를 복사해 기념으로 주고 원본은 영구보관하고 있다.
이밖에 비슷한 연구논문이 같은 시기에 학술지에 투고돼 누가 앞섰는지를 가려야 하거나, 국제 공동연구시 기여도를 가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연구노트 기록이 근거가 된다. 미국 퍼듀대는 특허출원시 연구노트를 토대로 발명자를 가려 아무나 공동발명자로 이름을 올리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증인 서명 받는 연구자 드물어
하지만 국내 연구자들의 인식은 미흡하다. 한국지식개발연구원이 최근 한국과학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는 연구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 연구노트를 작성하지 않는다는 연구자가 응답자(1,043명)의 13.3%에 달했다. 특히 “외국기업이 실사할 때 연구노트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연구자는 56.6%로 안다는 연구자보다 더 많았다.
연구노트를 작성한다(904명) 하더라도 “연구노트에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고 증인란에 정기적으로 서명을 받고 있다”는 연구자는 단 14.2%에 불과했다. 연구노트를 연구의 필수가 아닌 선택 정도로만 여기는 풍토를 그대로 보여준다.
더욱이 증거로 유효하려면 연구자 뿐 아니라 증인이 주기적으로 서명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잊기 쉬운 게 이 부분이다. 일본 이화학연구소는 연구책임자가 한 연구실에서 다른 주제의 연구를 하는 연구자들을 서로 증인으로 삼아 1주일에 한번씩 서명을 하도록 하고 있다.
김승군 연구위원은 “선진국을 따라잡는 연구 국산화 단계에서는 연구노트가 그다지 중鄂舊?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나라도 유수의 저널에 논문을 내는 창의적인 연구를 쏟아내고 있는 시점인 만큼 이 연구성과를 산업화까지 이어가려면 연구노트에 대한 인식을 통째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허청 정보기획팀 김미순 사무관도 “국가 연구개발 사업이 산업 현장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데에는 기술이전 단계가 아니라 오히려 연구 초기 기록단계부터 문제가 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며 “이제는 연구의 인프라와 함께 내용적인 면을 채워야 할 때”라고 말했다.
◆연구노트 이렇게 써야 한다
1. 노트 중간에 내용을 찢어버리거나 삽입해선 안 된다. 노트는 제본된 묶음 노트를 사용하고 바인더처럼 끼워넣기 쉬운 노트는 피해야 한다. 노트에 연속된 페이지 번호를 기재한다.
2. 특허기간을 고려해 연구노트의 보존기간을 30년으로 잡는다. 장기 보존을 위해 쉽게 열화되지 않는 종이, 내광성 내수성 있는 펜을 사용한다.
3. 실험일자, 발명자, 기록자와 기록일자, 증인의 서명란과 일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4. 가능하면 한 사람이 한 개 노트를 쓰고, 단일 프로젝트만 기재해야 한다.
5. 제3자가 노트를 보고 실험을 재현할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써야 한다.
6. 실험데이터는 물론, 발명의 착상, 착상의 실행을 위한 연구계획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
7. 실험을 실시한 후 즉시 기록한다. 다른 곳에 적어 두었다가 옮기는 일은 피해야 한다.
8. 연구활동이 특정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도록 시간상 공백이 없어야 한다. 휴가 등으로 불가피하게 공백이 생길 경우 그 사유를 기록해 두고 증인란에 서명을 받는다.
9. 사진, 데이터 출력물 등은 풀로 붙이고 붙인 경계부분에 서명한다.
10. 기록을 고쳐야 할 때는 수정액으로 지우지 말고 볼펜으로 줄을 그어 수정한다. 중요한 수정은 오기를 설명하는 주석을 따로 달아 날짜를 적고 증인 서명을 받는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