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 정기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더라구…."
얼마 전 사석에서 한 고위 공무원은 신임 사무관들과 상견례 때의 분위기와 소감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에선 당초 162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는 서울시 공무원(7ㆍ9급) 임용 필기시험이 화젯거리였다. 또 다른 참석자가 "이젠 7ㆍ9급 공무원만 돼도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을 듣는 세상이 된 거 아냐"라고 하자, 바로 그 고위 공무원이 맞장구를 치면서 '논두렁 정기'를 끄집어냈다.
그는 자신이 행정고시에 합격했던 당시와 지금을 비교했다. 우선 그가 행시에 붙은 1980년대 초반만 해도 나름대로 '신분 상승의 길'이 열려 있었다고 했다. 가난한 산골 마을이나 달동네에서 죽어라 공부해 각종 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금은 달동네는커녕 웬만한 중산층 자녀도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논두렁 정기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대부분 깡마른 몸집과 새까만 얼굴에 눈빛만 반짝 반짝거렸다고 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출세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넘쳤다. 그런데 그는 이런 논두렁 정기가 사라지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물론 '개천에서는 미꾸라지만 나온다'는 게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또 부유층 출신이 고위 직을 싹쓸이 한다고 해서 나라 사정이 이전보다 특별히 나빠지거나 반대로 좋아질 이유는 없다.
문제는 신분 상승의 길이 점점 더 막혀가고 있다는 데 있다. 사법ㆍ행정ㆍ외무 등 국가고시만 보자. 올해 합격자는 서울대 433명, 고려대 214명, 연세대 152명이었다. 옛날에도 명문대는 고시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지만, 명문대 입학생을 따져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잘사는 동네와 그렇지 않은 동네의 명문대 진학률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특수목적고를 제외하고 강남 고교 출신 서울대 합격생은 지난 10년 동안 전체 합격생의 12% 정도를 차지해 왔다.
각 대학은 해마다 입학 전형에서 수능과 논술,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반영 비율을 조정하고 있다. 교육 당국은 입시제도를 바꿀 때마다 '공교육 강화 및 사교육비 축소"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학원가에서는 "제도가 어떻게 변하든 질 좋은 사교육 혜택을 누리는 부유층 자녀들이 유리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정설처럼 떠돌고 있다.
결국 부유층 자제가 명문대를 거쳐 사회 지도층 자리를 꿰차는 부와 권력의 대물림이 더욱 굳어지고 있는 셈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정부의 대응은 답답하기만 하다. 본고사와 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를 허용하지 않는 '3불 정책'만 뇌까리고 있다.
마치 3불 정책만 지키면 교육 현장에서의 불평등을 막을 수 있다는 자기최면에 걸려 있는 듯 하다. 실제로는 각 대학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고교등급제 등을 적용하고 있는데 애써 눈감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 추석에도 사람들은 모이는 자리마다 참여정부를 실컷 욕해댔다. 잘하는 일이 거의 없는 탓이다. 북한 핵실험으로 사회 분위기는 더욱 뒤숭숭해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새싹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현실이 이어진다면 이는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실정으로 기록돼야 한다. 참여정부는 자나 깨나 개혁을 부르짖어 왔기 때문이다.
이종수 사회부 차장대우 j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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