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최근 의욕적인 공공미술 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서울 곳곳에 조각과 벽화를 설치하는 ‘도시갤러리 프로젝트’로 도시 공간에 예술성을 불어넣겠다는 것이다. 우선 10월 중 40군데를 선정해서 시범사업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도시 전체를 미술관으로 꾸민다? 좋다. 하지만, 서두르면 곤란하다. 공공장소를 미술품으로 치장하는 것이 공공미술이라는 생각은 더욱 위험하다. 왜 그런지, 그렇다면 어떤 방식이 바람직한지 프랑스 출신 그래픽 디자이너 루에디 바우어(50)의 작업이 좋은 힌트가 될 만하다. 마침 그가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작업한 공공디자인을 사진과 자료로 소개하는 전시가 대학로의 제로원 디자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바우어는 1980년대 초반부터 도시 공간을 디자인해왔다. 주요 건물, 거리, 공원, 공항, 대형 주차장, 행사장 등 다양한 공공장소가 그의 손길을 거쳤다. 프랑스 퐁피두센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파리국제대학 기숙사, 독일 쾰른 본 공항, 뮌헨 분데스가르텐 공원, 스위스 베른 환경부 청사, 제네바 현대미술관, 캐나다 몬트리올의 공연지역 등 다 열거하기 힘들 만큼 많다.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그는 방향 표식 등 각종 신호와 정보 체계를 통합적으로 디자인함으로써 특정 공간에 시각적인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을 해왔다. 쾰른 본 공항은 청사 내 모든 시설물 표지를 그의 디자인으로 통일해 발랄하고도 편안한 공간을 연출했다. 구시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프랑스 리옹의 보행 표식, 유리와 철골 외관이 인상적인 퐁피두센터 곳곳에서 마주치는 각종 표식도 그의 작품이다. 그의 디자인은 간결함, 기능성, 아름다움으로 도시 공간을 풍성하고 활기차게 만든다.
그의 공공디자인은 단순한 꾸밈이 아니라 공공장소가 지닌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는 작업이다. 영화관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영화가 빛의 예술임에 착안, 움직이는 빛과 조명으로 건물 안팎에 필름 이미지를 디자인했다. 파리국제대학 기숙사는 구내 각종 표식에 세계 각국 문자를 조합해서 고안한 알파벳을 사용해 여러 나라 학생이 모이는 곳이라는 특성을 나타냈다.
지역성을 철저히 살리는 것도 그의 작업의 핵심이다. 뮌헨의 야외 환경박람회장인 분데스가르텐의 각종 표식은 이 곳에 흔한 밀짚과 푸대로, 퓌드돔 화산 안내 표지는 용암이 굳은 돌로 만들었다. 그는 누가 봐도 알기 쉽고 기능적인 디자인을 하되, 그 지역에 특수한 시각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강조한다. 지역성을 잃어버린 채 글로벌 판독성에 맞춰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한국에서 작업한다면 어떨까. 아무리 공공디자인의 명수라지만, 악전고투가 될 것 같다. 엎치락뒤치락 변모를 거듭하는 어수선한 도시 환경, 거칠고 혼란스런 간판의 홍수도 문제이고, 국내에서 공공디자인의 개념이 낯선 편이라 관청 등 공공기관의 이해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겠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건축과 디자인 등 여러 분야의 협력, 공공기관의 지원을 바탕으로 여러 해에 걸쳐 장기적으로 해온 것들이다. 예컨대 리옹 프로젝트는 2010년까지 15년 간 이어진다. 뒤죽박죽 와중에 빨리빨리를 주문하는 관료주의 행정 밑에서는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공디자인은 공공미술의 일부다. 따라서 루에디의 작업이 공공미술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모범적인 사례이자 제안이라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한 수 배우는 계기로 매우 유용하다. 요즘 지자체마다 도시 정비와 재개발이 한창이다. 거기에 참여하는 공무원과 전문가들이 와서 보면 좋겠다. 전시는 29일까지. (02)745-2490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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