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여교사는 "한국말 중에서 '추석'이란 말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가을(秋)'이란 말도 좋은데 거기에 '저녁(夕)'까지 합쳐지니, 참 정겹고 낭만적인 명절 이름이라는 것이다. 20여년 전 일본어 학원에서 들은 말이다.
그 말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언어감각 차이 때문이다. 한문을 상용하는 일본인의 감수성으로서 그는 추석을 좋아했고, 새삼 나도 추석이라는 어감을 음미해 보게는 되었지만, 그보다는 한가위라는 말을 더 정겹게 느끼고 있다.
▦ 일본식 추석은 '오봉'이다. 오봉연휴가 되면 일본인 약 2,000만 명이 고향을 찾아 성묘를 하고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시기(7월13~16일)가 찌는 듯한 여름이어서, '오곡이 무르익는 계절'의 추석과는 명절 감각에서 차이가 있다.
중국인은 우리와 같은 날 '중추절(중치우지에)' 명절을 맞는다. 가족과 친지가 모여 월병을 먹지만, 분위기는 설날인 춘절(춘지에)만 못하고 귀성객도 많지 않다. 미국의 추수감사절 연휴는 11월 마지막 목요일 시작된다. 이 기간에 3,000만 명 이상의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가족을 찾아 만나고 칠면조 요리를 즐긴다.
▦ 어릴 때는 세배하고 돈 받는 맛에 설이 추석보다 좋았다. 어른이 되어서는 세뱃돈 받을 일이 적기도 하지만, 삽상한 날씨 때문인지 추석이 더 기다려진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라는 말에는 농경사회적 풍요로움과 함께 기후에 대한 만족감이 들어 있을 듯하다.
그러나 문명의 흐름은 추석의 바탕이 되었던 농촌사회를 와해시켜 가고 있다. 우리 농가인구는 8%대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도 추석 전에 햇과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신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 농촌이 급격히 도시화하고 추석 풍경도 변하고 있다. 근래 주변에서 추석 풍습으로 보름달 달맞이, 강강술래, 기마전, 줄다리기, 소(牛)놀이 등을 본 적이 없다. 반면 새로운 풍속도로 추석 해외여행자 수가 늘고 있다.
올 추석에는 30여만 명이 해외 나들이에 나선다. 와해되어 도시화하는 농촌인도, 해외 추석 나들이를 하는 도시인도 예전보다 풍족해진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왠지 한가위가 예전처럼 넉넉해 보이지는 않는다. 미풍과 정신은 빈약해지고, 외양만 비대해지기 때문일까.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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