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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은 사람들/ 파멸로부터의 탈출… '斷도박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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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은 사람들/ 파멸로부터의 탈출… '斷도박 모임'

입력
2006.10.03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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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웠지. 죽도록 원망도 했어. 근데 가족이 뭔지… 노름보다 질기더군. 아무리 발버둥쳐도 버릴 수가 없잖아.”

60줄에 접어든 김모 여인은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며 지난 날들을 떠올렸다. 30년간 노름판을 쫓아다니느라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화병(火病)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임종마저 외면한 무정한 남편이었다. 하지만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었던 그 옛날의 분노는 남편이 도박을 끊은 지 12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용서와 사랑으로 바뀌었다.

남편 이모(60대 초반)씨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한마디로 황홀경이었지. 세상의 온갖 무게에서 해방되는 듯한 그 느낌. 하지만 가정은 파탄 나고 내 자신은 껍데기만 남았지.” 이씨는 스무 살도 채 안돼 장난 삼아 도박을 즐기다 마작 등 안 해본 노름이 없을 정도의 꾼이 됐다.

이씨의 고백에 중년 남녀 50여명의 눈시울은 어느새 발갛게 달아올랐다. 부인 김씨가 남편을 꼭 안아주었다.

한가위를 일주일 앞둔 지난 달 29일 저녁, 서울 동작구 사당동 한 성당에서 조촐한 잔치가 열렸다. 이씨가 도박을 끊은 지 12년이 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다. 이제는 가정의 행복을 온전히 되찾은 이씨는 “내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열심히 남은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패가망신(敗家亡身)의 대명사이자 ‘손목을 자르면 발로 한다’는 도박은 ‘불치병’이 아니다.

이 성당은 ‘단(斷)도박’을 선언한 100일째 날과 매년 선언한 날에 맞춰 도박 중독자와 가족들을 초청, 다짐의 자리를 마련한다. 어느덧 17년째다.

“울화통이 터져 내가 먼저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유모(50대 초반ㆍ여)씨는 이씨 부부를 부러운 듯 바라보며 가슴 속에 묻어뒀던 사연을 끄집어냈다. “5년 전부터 노름에 빠지더니 돈벌이는 고사하고 내가 버는 돈도 족족 가져가는 거에요. 가족 모두 외면하는 남편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던 남편 최모(50대 초반)씨도 “나도 끊으려고 무진 애썼어. 알기나 해. 도박 중독자로 불리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라며 절규하듯 외쳤다.

분을 삭이며 울먹이는 두 사람을 향해 ‘단도박’으로 가정의 행복을 찾은 회원들이 위로의 말을 건넨다. “남편의 도박 때문에 자신을 학대하는 것은 더 큰 불행일 뿐이에요. 그럴수록 남편을 더 이해하고 가정의 행복을 느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도박중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싫겠지요. 하지만 가족과 주변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들은 서로를 ‘여럿이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뜻의 ‘협심자(協心者)’로 부르며 도박 중독으로 인한 가족간의 갈등을 해결해 가고 있었다.

도박장을 찾아 떠난 가장을 원망하며 서러움만 곱씹었던 명절도 이제는 손꼽아 기다려진다. 김모(40대 중반ㆍ여)씨는 “아이들이 명절 때면 밖으로 나가버렸는데 남편이 마음을 잡아 모처럼 명절 때 집안이 꽉 차게 생겼다”고 했다. 박모(30대 후반)씨는 “지난해 추석 때는 아들(6)이 복통으로 병원에 실려간 순간에도 강원 정선카지노에 있었지만 도박을 끊은 올해는 좋은 아빠로 거듭나겠다”고 환하게 웃었다.

도박의 광기에 묻혀 잠시 잊었던 가족의 정을 다시 찾은 얼굴마다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斷도박 모임은

‘단(斷)도박’은 1957년 미국에서 시작된 도박 중독자와 가족들의 모임이다. 도박으로 인한 고통을 나누고 희망을 전하면서 도박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목적이다. 우리나라에는 84년 도박 중독자였던 외국인 신부가 소개했다. 현재 45개 모임 700여명이 매주 모여 새로운 삶을 찾아가고 있다. 이름 나이 직업 등을 묻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www.dandobak.or.kr (02)3473-0879.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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