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관계 법ㆍ제도 선진화방안(노사관계 로드맵)을 논의할 때 민주노총 내에서는 복수노조제 도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민주노총 지도부가 복수노조제 도입을 반대하지 못한 것은 소수 강경파의 비난이 두려웠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국노총이 민주노총 지도부 대신에 총대를 메고 복수노조제 시행 3년 유예를 포함한 노사관계 로드맵에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합의해 놓으니까 ‘한국노총이 노동자의 권리를 팔아 야합했다’며 뒤통수를 때리고 있습니다. 비겁합니다.”
이용득(53) 한국노총 위원장은 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노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민주노총이야말로 가장 비민주적인 조직”이라며 “관계를 복원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_노사관계 로드맵 합의를 놓고 벌어진 민주노총과의 관계를 복원할 계획은 있으신지요.
“전혀 없습니다. 민주노총은 복수노조제의 즉각 시행을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협상은 주고 받는 게 아닙니까. 얻기만 하고 못 내놓겠다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발상이죠. 노동계에 치명타가 될 노조 전임자 임금 금지의 시행 유예를 받았으니 우리가 경영계에게 복수노조제 유예를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노사관계 로드맵 합의를 한 날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내게 폭력을 행사했고, 며칠 뒤에는 한국노총 임원실에 난입해 집기를 부수며 행패를 부렸습니다. 민주노총은 민주사회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조직입니다.”
_노사관계 로드맵 합의 때 민주노총이 빠진 것을 두고 ‘야합’이라는 비난이 있습니다.
“민주노총은 ‘한국노총이 노동자의 기본권을 팔아 노동계의 숙원인 복수노조제 도입을 3년간 유예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복수노조 허용을 가장 강하게 말한 사람은 바로 접니다. 하지만 한국노총을 비롯해 민주노총 사업장에서는 복수노조제를 꺼리는 분위기가 대세였습니다. 민주노총 관계자도 ‘올 봄에 자체 여론조사를 했는데 80% 정도가 복수노조 도입에 반대했다’고 털어 놓았어요. 그래서 민주노총 조준호 위원장에게 ‘총대를 대신 메줄 테니 따라와 달라’고 부탁했죠. 그런데 힘들게 합의하고 나니까 뒤에서 ‘야합’이라고 돌팔매질을 해대니 분통이 안 터지겠습니까.”
_노사관계 로드맵 내용에 만족하십니까.
“철도 같은 필수공익사업장의 파업권을 사전에 구속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직권중재를 폐지한 것도 성과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고용시장의 혁명을 가져올 수 있는 제도들이 마련됐다는 점입니다. 노사관계 로드맵에는 사용자가 근로자를 해고할 때 그 사유를 서면으로 통보하도록 하고, 정리해고 된 사람을 나중에 기업 사정이 좋아질 경우 재고용해야 한다는 조항들이 들어갔습니다. 앞으로는 영문도 모른 채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해고 통보를 받는 황당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_합리적 노동운동으로 노선을 잡고 있는데요.
“합리적 노동운동이란 다수 노동자에 의해 국민과 함께 가자는 것이죠. 우리 노동운동은 소수가 다수를 끌고 가는 기형적인 형태입니다. 노조는 그동안 전투적 운동으로 흐르다 보니 계속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머물러 왔습니다. 권력과 자본에 대해 공격만 했지 사회적 주체로서 책임은 지지 않았죠. 지금은 노동운동이 정치 민주화에 앞장서던 1980년대가 아닙니다. 국민정서를 무시하는 집단이기주의는 더 이상 설 곳이 없습니다. 한국노총이 정부와 손잡고 건전한 외자유치를 위해 미국과 일본에 간 것도 이런 맥락에서 입니다.”
_합리적 노동운동 노선에 대해 ‘어용’ ‘자본의 나팔수’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한국노총은 부산에서 국제노동기구(ILO) 아시아ㆍ태평양지역 총회가 열리고 있던 와중에 정부가 노사관계 로드맵 협상과 관련해서 ‘노사합의에 관계없이 정부 의지대로 가겠다’는 방침을 세웠을 때 국제망신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도중에 회의장을 철수했습니다. 이런 게 어용입니까. 우리는 오히려 정부를 굴복시켰습니다. 합리적 노동운동은 투쟁과 협상을 병행하는 것입니다.”
_이 위원장의 파격적인 행보를 두고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오해입니다. 지난 총선 때도 국회의원 유혹은 많았지만 다 뿌리쳤습니다. 의원은 명목상으로는 입법기관이라고 하지만 당론에 끌려 다니다 보면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반면 노총 위원장은 노동 흐름과 제도 등을 소신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일신영달을 위한, 또는 이념에 매몰된 노동운동은 반대합니다.”
_우파 노동운동을 표방하는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이 출범했습니다.
“시민단체 수준이죠. 이념적 노동운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저와 궤를 같이 합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특정 정치조직 쪽에 편향된 것 같아요. 순수노동운동을 지향하는 나와는 맞지 않습니다.”
_참여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해 평가해 주십시오.
“노사 의견을 많이 들으려고 합니다. 노사관계 로드맵 논의 과정에서도 고압적이긴 했지만 막판에는 노사 간 합의를 들어줬습니다. 아쉬운 점도 있죠. 고용 쪽은 몰라도 정부는 노사관계에서 손을 떼야 합니다. 정부가 모든 걸 틀어쥐려고 하면 될 일도 안 됩니다. 민간에게 넘길 건 넘겨야 효율성이 높아집니다. 지금 정부는 이 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것 같아요. 노사의 자율적 능력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실업급여나 고용보험의 집행ㆍ관리도 마찬가지죠. 정부가 다 하려고 합니다. 돈은 노사가 다 내는데 생색은 정부가 내는 꼴이죠. 덴마크 같은 곳에서는 실업급여를 노총이 줍니다. 노사정위원회에서 설립이 논의될 노사발전재단 같이 독립적인 민간기구를 만들어 공정하고 투명하게 운영하면 됩니다.”
_노동운동의 위기라는 말이 일상어가 된 지 오래입니다.
“노조직률이 10%대 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합니다. 노조 한다면 가족부터 도시락 싸 들고 반대하는 분위기입니다. 노사 간에 사회적 역할을 찾아서 국민의 공감대를 얻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다수가 노동운동을 이끄는 시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노동운동가 하나쯤은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프로필
△1953년 경북 안동 출생 △덕수정보산업고ㆍ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상업은행노조 위원장 △한국노총 노동악법저지투쟁상황실장 △전국금융노조 위원장 △한국노총 개혁특별위원회 공동위원장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 양 노총 위원장 비교
노사관계 법ㆍ제도 선진화방안(노사관계 로드맵) 합의를 놓고 차갑게 등을 돌려 버린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깊어진 갈등의 골 만큼이나 양 노총 위원장의 리더십도 대조적이다.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타고난 승부사다. 목표가 보이면 정면 돌파한다. 금융산업노조 간부 시절에 노사분규를 이끌다 두 차례 투옥을 경험하면서 투사 이미지를 굳힌 그는 올 초 합리적 노동운동을 기치로 내걸며 온건노선으로 파격 변신을 했다.
한편으로 그에게는 승부사 기질도 있다. 8월에는 이상수 노동부 장관의 ‘노사관계 로드맵 일방처리 방침’에 반발해 부산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ILO) 아시아ㆍ태평양지역 총회장을 박차고 나가더니, 9월에는 단식농성이라는 최후의 카드로 정부를 압박해 한국노총의 뜻대로 복수노조제와 노조전임자 임금 금지 시행을 3년간 유예하는 것을 골자로 한 노사관계 로드맵에 타결했다.
조준호(48) 민주노총 위원장은 관리자형이다. 사회적 교섭을 중시한 전임 이수호 위원장의 노선을 계승한다. 강성인 민주노총을 이끌며 스스로 “노사관계 로드맵 협상을 하면서 투쟁이란 말은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온건주의자다.
그러나 전력은 이 위원장 만큼 강성이다. 1994년에 노ㆍ경총 임금가이드라인 합의에 반발해 한국노총 점거농성을 주도했던 전국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위원장 출신이다. 기아자동차 노조 시절인 87년에는 노조 민주화와 임금인상을 위한 대중투쟁을 주도해 구속됐다.
이 위원장의 변신은 “노총 위원장인지,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인지 모르겠다”는 비난을 받곤 한다. 비정규직 관련 법안 문제로 시끄럽던 5월1일 노동절에는 집회 대신에 노동자 마라톤대회를 개최했고, 포스코 사태로 노동계가 소란스러웠던 7월에는 수해지역돕기에 나섰다.
조 위원장은 조직 장악력이 떨어진다. 그는 노사관계 로드맵 합의 전날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로비를 위해 미국 출장길에 올라 주위를 당황스럽게 했고, 올들어 열린 3차례의 대의원대회를 모두 파행으로 끝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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