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정기국회 때마다 되풀이 되는 미스터리가 있다. 새해 예산안의 심의와 처리다. 정부 예산안이 발표되면 야당을 비롯한 각계의 논자들은 새 예산안이 나라를 온통 거덜내기라도 할 것처럼 목소리를 높여 반대와 비판에 나선다. 한 보름쯤 이런 '난도질'이 계속된다.
이어 국정감사라는 '큰 장'이 서고, 여야가 목에 핏대를 올리는 나날이 되풀이된다. 그런데 정작 예산안 처리시한이 다가오면 돌연 예산안의 종적이 묘연해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연례적인 진통(흔히 야당 의원들이 의사당 안에서 담요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등의) 끝에 정기국회는 느닷없이 끝나고, 예산안 얘기는 신문 한 귀퉁이에 '내년 예산 얼마로 확정' 어쩌구 하는 1단 기사로만 망망대해의 부표처럼 잠깐 떠올랐다가 허망하게 사라질 뿐이다.
이런 현상은 정부의 정책방향이 결국 예산에 집약된다는 점과, 그 정부를 견제하는 국회의 권한이 궁극적으로 입법권과 국정감사권 외에 예산승인권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미스터리가 반복되는 것일까. 국회의 움직임에 정통한 한 인사는 질문이 오히려 딱하다는 듯이 잠깐 따분한 표정을 짓더니, 술술 풀어나간다.
"복지예산이 지나치게 많다 이거죠? 그래서 중소기업 지원예산이나 뭐 이런데 돈 더 써야 한다, 이 얘기죠? 일리 있죠. 그런데 보세요. 중소기업 지원? 이거 막연한 얘깁니다. 반면 복지예산은 당장 도시 서민 가정에 월 5만원씩이라도 돈이 지급되는 얘기예요. 당장 노인들한테 월 10만원씩 준다는 거 아녜요? 대선 앞두고 있잖아요. 누가 거기에 시비 걸고 나서겠어요. 그거 표 깎아 먹는 짓이잖아요."
얘기는 공무원 숫자 늘리기와 인건비 얘기로 넘어간다.
"다들 목소리 높이죠? 그것도 그래요. 욕은 하지만 야당이 나서서 그거 예산 깎겠어요? 공무원 수 줄이고, 임금 동결하자고 하겠어요? 그것도 안 될 얘기죠. 안 그렇겠어요? 우리 공무원 유권자수가 얼만지 아세요. 지난 6월 기준으로 물경 95만826명이예요. 국회의원들요? 이 엄청난 표에 불 지르는 일 절대 안합니다."
요컨데 '전초전'에서는 맘껏 소리 높여 정부 예산안을 난도질하지만, 막상 '본게임'에 들어서면 게임은 결국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가 되며, 이렇다 보니 예산안 처리는 의례적으로 '모럴헤저드'를 빚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올해도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을 두고 논란이 한창이다. 특히 한나라당은 지출 기준으로 올해 대비 6.4% 늘어나는 내년 예산안을 두고 "나라 빚이 늘고 있는데도 정부가 내년 예산안을 팽창 편성했다"며 "후세에 빚을 물려주는 파렴치한 짓"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경상경비 절감 ▦공무원 임금 동결 ▦각종 위원회 정리 등 과감한 세출조정을 촉구했다.
6.4%의 지출예산 증가를 팽창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한나라당의 주장은 예산안에 대한 다수 국민의 정서를 반영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번 만큼은 예산안 심의와 승인과정에서 한나라당이 정책적 주장을 얼마나 예산에 반영할 지 새삼 주목된다.
국회의원들에게 골프를 치지 말라느니 접대를 받지 말라느니 하는 식의 무슨 절대적 윤리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할 뿐더러, 넌센스라고 생각한다. 대신 한나라당이 정권을 넘겨받겠다면 최소한 주장하고 내 건 바를 책임 있게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장인철 정치부 차장대우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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