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년전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한 마오쩌둥(毛澤東)의 경구는 인사와 사정의 칼을 쥔 권력자가 반대세력을 가차없이 축출하는 21세기 중국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30일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57주년 국경절(10월 1일) 기념 연회에서 “부패 척결 작업을 견지하겠다”고 밝힌 것은 상징적이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겸 총서기 등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모두가 참석한 행사에서 나온 이 발언은 후 주석 권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선언이다.
후 주석은 지난달 24일 상하이방(上海幇)의 핵심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당서기의 축출을 결정한 이후 숨가쁘게 상하이방 제거 작업을 진행해 왔다. 천 서기가 연루된 상하이시 사회보장기금 특혜대출 사건은 단번에 상하이방을 빈사상태로 몰아넣었다. 상하이방 좌장 황쥐(黃菊) 상무부총리, 숨은 실력자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장남 장?x헝(張綿恒) 상하이 과학원장 등도 신변이 위험하다.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 등 천하를 호령해온 상하이방 출신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내년 10월 17차 당 대회에서 퇴진한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상하이방의 운명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후 주석 권력 장악의 1막일 뿐이다. 내년 당대회를 계기로 13년간의 장쩌민 시절 형성된 장쩌민 세력을 축출하고 그 자리에 후 주석의 측근들을 심어야 한다.
중국의 권력장악은 당 중앙위원회 개편으로 이해하면 된다. 198명의 중앙위원, 158명의 후보위원 등 356명의 중앙위원을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권력장악의 요체이다. 당 중앙위원 중에서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지도자), 25명의 정치국원, 장관, 지방 당서기 등이 나온다. 공산당은 통상 당대회 개최 전 소조를 구성하고, 누구를 발탁하고 누구를 제거할지를 결정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이 작업은 이미 상당부분 진행됐다. 최근 후 주석 직계인 저우창(周强) 공청단 서기가 후난(湖南)성 성장에 임명되는 등 후 주석 친위로 불리는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인사와 안후이(安徽)성 출신 인사들이 중앙위원 선출에 대비, 요직을 채우고 있다. 2002년 권력을 넘겨받았을 당시 후 주석측 중앙위원은 채 열명도 안됐지만 내년 당 대회를 계기로 절반을 넘을 것이다.
내년 당 대회를 기점으로 집권 2기를 맞는 후 주석은 2012년 이후에도 장쩌민처럼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2~3년간 유지할 것이다. 하지만 혁명원로가 사라지고 집단지도체제의 골간이 강화되는 현 상황에서 후 주석이 아무리 권력을 집중한다 해도 덩샤오핑이나 장쩌민과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기는 어렵다.
권력 교체기마다 나타나는 정적 제거가 법치(法治)가 아닌 인치(人治)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이는 중국 정치의 아킬레스건이며, 궁극적으로 권력의 불안정성을 증대하는 내부 요인이기도 하다.
▦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주요 숙청
-1952년 동북지방 군벌 가오강(高崗) 축출
-1959년 마오쩌둥 경제노선에 반대한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 축출
-1962년 대약진운동 등 경제실책으로 마오쩌둥 2선 후퇴
-1966년 마오쩌둥, 펑전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 축출
-1971년 마오의 후계자로 자처하던 린뱌오(林彪) 망명 중 사망
-1975년 재기용된 덩샤오핑 재숙청
-1977년 마오쩌둥 사망 직후 4인방 축출
-1978년 덩샤오핑, 국가주석 화궈펑(華國鋒) 제거
-1987년 덩샤오핑,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 축출
-1989년 덩샤오핑,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 축출
-1993년 덩샤오핑, 천안문 진압의 주역인 양상쿤(楊尙昆) 형제 축출
-1995년 장쩌민, 천시통(陳希同) 베이징시 당서기 축출
-1997년 장쩌민, 라이벌 차오스(喬石) 정치국 상무위원 축출
-2006년 후진타오, 상하이방(上海幇) 핵심 천량위(陳良宇) 상하이 당서기 축출
베이징=이영섭 특파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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