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중심주의가 피고인들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보다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하지만 기회에는 비용이 따른다. 공판중심주의 아래에서는 검찰에서 작성된 조서보다는 피고인의 구두 진술이 판사의 유무죄 심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해진다. 그런 만큼 소송 전문가의 조력을 더욱 필수적이 된다.
현재 형사 법정에서는 하루에 평균 20여 건의 재판이 이뤄진다. 하지만 공판 중심주의가 확대되면 재판 시간이 길어져 하루에 재판은 4~5개 밖에 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별기일을 잡아 심리를 길게 하는 재판의 경우 2,3시간이 소요되지만 공판 중심주의가 되면 그 재판소요 시간도 2배 정도더 걸린다.
첫 공판중심주의 재판으로 평가받는 강동시영아파트 재개발 조합장 비리 사건을 맡았던 김영갑 변호사도 “주 3회 재판에 한 재판이 5,6시간 정도 걸려 다른 사건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 사건에만 매달려야 했다”고 말했다.
때문에 공판중심주의 하에서는 소송 비용이 증가, 법률 소비자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창우 대한변협 공보이사는 “현재 평균 일반 형사재판 수임료가 500만원 정도임을 감안했을 때, 공판중심주의가 실시되면 변호사 수임료는 최소 지금보다 5,6배인 2,500만원~3,000만원 선까지 치솟을 수 있다”며 “과연 일반인들이 이 액수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터무니 없다는 반박도 만만치 않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우리나라의 변호사는 의뢰인에게서 일을 수임할 때 받는 착수금과 성공보수금 등을 미리 약정해 일을 하는 구조”라며 “시간제(time charge)를 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와 직접 비교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도 “형사 재판의 경우 시간제를 하는 것은 우리 정서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법정 진술 공방이 본 게임이 되는 민사의 경우 대형 로펌들이 시간제를 채택하면 오히려 비용이 줄어든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 법원 관계자는 “민사의 경우 구술주의 확대로 인해 재판시간은 길어지지만 오히려 집중심리로 인해 기간이 단축되는 효과가 있어 비용이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고 강조했다.
공판중심주의가 악용될 시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이 굳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유명 변호사를 선임해 오랜 재판으로 무죄를 선고받은 미국의 OJ심슨 재판을 예로 들어 유전무죄 무전유죄 폐해를 지적하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변호사와 검찰이 피고인의 유ㆍ무죄를 결정하는 배심원들을 설득해야 하는 미국의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법조인들은 오히려 공판중심주의의 확대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더 클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관계자는 “법정에서 자신들이 주장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이야기하면 지금 재판 구조보다 재판 결과에 깨끗이 승복할 수 있다”며 “억지를 부리며 분풀이식으로 재판에 달려드는 것보다 충실하게 재판에 임해 결과에 승복하고 항소율을 줄이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를 줄이는 결과”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공판중심주의로 조정이나 화해를 통한 사건해결이 많아지면 불필요한 소송이 얼마나 줄어들겠냐”며 “공판 중심주의의 정착은 사회적 비용 절감 차원에서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상진 기자 okome@hk.co.kr
■ 법정·판검사 대폭 늘려야
공판중심주의를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비용의 지불이 불가피하다. 공판과 공소유지를 담당한 판사와 검사를 대폭 늘려야 할 뿐 아니라 형사법정까지 새로 지어야 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예산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형사 법정의 확충이 선행돼야 한다. 현재 전국 지방법원 본원과 지원의 형사 법정은 145개. 이 법정을 사용해야 하는 형사 합의부, 단독 재판부, 형사 항소부는 전국 347개이다. 하나의 법정을 2.4개의 재판부가 나눠 쓰는 것이다.
법정의 부족은 공판 개정 횟수를 제한한다. 지난해 형사합의부의 1주일 평균 공판 개정 일수가 1.36일에 그친 이유 중 하나로 법정 부족이 꼽힌다. 현상태로 공판중심주의가 실현되면 재판 시간이 더 길어질 것이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꼴로 재판을 열어서는 사건을 제때 처리할 수 없다. 대법원 관계자는 “1개의 재판부가 1개의 형사법정을 사용해 일주일 내내 공판을 여는 것이 이상적”이라며 “그러나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하는 문제라 현재는 1개 법정을 2개의 재판부가 쓰는 것을 목표로 예산 당국과 협의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법관을 확보하는 것도 문제다. 현재 1심을 담당하는 전국 지방법원ㆍ지원의 형사합의부는 73개, 형사단독재판부는 245개이다. 담당 재판부가 적다 보니 지금도 형사단독판사는 한번 공판을 열 때 20~30개의 사건을 다루는 속전속결식 재판을 하고 있다. 한 판사는 “기소 내용을 부인하는 사건에서 증인도 부르고, 피고인 변소도 다 들으려면 지금 형사 재판부의 50%는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판담당검사는 현재보다 2~3배 더 필요하다. 전국의 공판전담검사는 154명이고 수사와 공판을 겸하는 검사는 56명이다. 공판검사 1명이 평균 1.7개의 재판부를 맡는 것이다. 각 재판부에 일주일에 2번씩 재판을 연다면 검사는 일주일에 약 4번 공판에 참석해야 한다. 재판에서 이뤄지는 사건에 대해 검토하고 준비할 평일 시간은 하루밖에 없는 셈이다.
한 검사는 “지금도 공판검사는 주말에 매일 출근해 재판을 준비하는데 공판중심주의가 돼 법정 쟁점 공박 자료까지 준비해야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하지만 수사 검사도 모자란 판이기에 공판검사 증원은 쉽지 않은 문제”라고 말했다.
고주희 기자 orwell@hk.co.kr
■ OJ심슨 승소처럼 '유전무죄?'
1990년대 미국의 ‘OJ 심슨 재판’은 공판중심주의가 시행되는 미국 법정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피고인의 부와 유능한 변호사의 결합이 실제 재판 과정에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는지를 엿보게 한다. 미국 언론들이“돈이 심슨을 살렸다”고 평할 정도로 이 재판은 미국판 유전무죄 논쟁을 불러일으켰었다. 자신의 전 부인과 그녀의 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전미 프로미식축구(NFL)스타 심슨이 체포될 당시 상황은 그에게 불리했다. 경찰은 그의 집에서 그와 전 부인의 피가 묻은 장갑을 발견했고, 알리바이도 거짓임을 밝혀냈다. 살인현장에서 나온 혈흔은 DNA감정 결과 심슨의 것이 확실했다.
심슨은 재판이 시작되자 1,000만달러(약 100억원)을 들여 초호화 변호인단을 구성했고, 변호인단은 살인 사건을 인종문제로 몰아갔다. 이들은 피 묻은 장갑을 찾은 백인 형사가 심슨에게 흑인을 비하하는 ‘니거(niggerㆍ검둥이 자식)’라는 말을 했다는 근거로 장갑을 찾아낸 LA 경찰이 인종주의자여서 그 증거를 조작했다고 몰아붙였다. 증거를 하나하나를 두고 지리한 공방이 이어지는 재판이 계속된 끝에 심슨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의 OJ 심슨 사건 재판 사례를 우리의 공판중심주의에 적용하기는 무리일 수 있다. 한 법원 관계자는 “미국의 형사재판에서는 재판에 이기기 위해 배심원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심슨의 변호인들은 당시 12명의 배심원 중 9명이나 되는 흑인들의 감정에 호소하기 위해 인종차별문제를 부각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가 2007년부터 국민참여 재판참여 제도가 실시된다고 해도 전문 법관이 유무죄 판단과 양형 결정을 하기 때문에 심슨 재판과 같은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적다”고 말했다.
박상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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