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관(前官) 변호사’가 법조계에서 갖는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대형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서초동 법조가에는 검찰과 법원에서 고위직을 지낸 거물급 변호사들의 명단이 떠돈다. 이른바 ‘전관 리스트’다. 최근 법조비리 사건으로 기소된 조관행 전 고법부장판사가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르자 검찰 고위직을 지낸 변호사들을 찾아 자문을 구한 얘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이용훈 대법관은 26일 서울고법ㆍ지법 강연에서 “요즘에는 (피의자나 피고인이 변호사를 선임할 때) 대부분 전관 아니면 연고를 찾는다”며“지금 가족들이 변호사 소개해 달라고 하면 법조인 연감 찾고 해서 소개해 주지 않나”고 지적하기도 했다 .
전관이란 검사, 판사를 지내다 변호사 개업을 한 법조인을 통칭해 말한다. 전관의 유효기간은 보통 2년. 이 기간 동안 전관 변호사들은 기소ㆍ불기소, 유ㆍ무죄, 형량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관예우는 일종의 담합 행위인데 이런 관행이 유지되는 배경에는 ‘현직시절 박봉으로 일했으니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법조인들의 정서가 묵시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판중심주의가 본격적으로 실시되면 전관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재판에서 변론이 이뤄지기 때문에 전관들이 ‘막후 변론’의 영향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현재 고위직을 지낸 변호사들이 직접 법정에 나와 후배 검사나 판사 앞에서 사실 관계와 법리 다툼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현재 피고인조차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를 정도로 불투명한 재판 과정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법정에서 변호사들은 ‘수사기록 중 증거 ○○호는 인정하나, ○○호는 불인정하므로 반론서를 제출합니다’는 말과 함께 서류만 제출하고 몇 분 만에 공판을 끝내 버린다. 이 결과 판사의 유ㆍ무죄 판단, 형량 결정은 재판이 아니라 판사실에서 검찰 수사기록을 검토하며 이뤄진다.
형식적 재판은 판사를 제외한 사람들이 재판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어 판사가 전관예우라는 재량을 행사할 여지를 만들어 준다. 한 판사는 “변호사들이 판사실을 찾아와 얘기하면 심증이 흔들릴 수가 있다”며 “그런데 판사실에 접근 가능한 사람은 전직 상관인 전관 또는 학연, 지연이 있는 변호사”라고 실토했다.
그러나 검사, 변호사간 유ㆍ무죄 다툼이 방청객이 지켜보는 공개 법정에서 이뤄지면 판사도 전관을 예우할 수 없게 된다. 다른 판사는 “공판중심주의 시범실시를 해보니 공판이 끝나면 판사는 물론 검사, 변호사들도 대강 ‘혐의가 인정되는 것 같다’‘아니다’는 판단이 나온다”며 “더욱이 방청객이란 감시자가 있는데 어떻게 판사들 마음대로 봐주고 말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대신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변호사의 변론 실력이다. 공판중심주의에서 판사들은 수사기록은 전혀 보지 않고 공소장만 읽은 ‘백지상태’로 재판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검사와 변호사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증거,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시하는지를 보며 유ㆍ무죄 심증을 굳히게 된다.
고위직을 지낸 전관이라 해도 변론실력을 갖추지 못하면 판사가 특혜를 주려 해도 불가능한 구조가 되는 것이다. 서울의 한 부장판사는 “피고인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해 사건을 공부, 치밀한 방어 논리와 증거를 제시하는 변호사가 유리한 재판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렇다고 해도 법조비리의 고질인 전관예우 문제가 모두 해소되진 못한다. 검찰에선 지금처럼 법관의 재량권이 넓다면 전관이 사라지기 힘들 것이란 반론이 나온다. 대법원은 이를 인정하고 양형기준표 등을 만들어 판사 재량권을 줄이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공개변론에 다른 재판 장기화를 피하려고 검찰 수사단계에서의 검찰출신 전관을 통한 불기소 로비가 더 치열해질 수도 있다.
고주희 기자 orwell@hk.co.kr
■ "말 잘해야 먹고 산다" 변호사들 화술공부
서울 서초동의 A 변호사는 요즘 바쁜 일정 중에도 일주일에 두 번씩 시간을 내 화술(話術)학원을 찾는다. 의뢰인의 입장을 서면으로 대변하는 것은 자신 있지만 상대방을 설득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학원비는 한 달에 40만원 가량. 앞으로 공판중심주의와 구술(口述)주의가 강화되면 의뢰인들이 말 잘 하는 변호사를 선호한다고 하니 이 정도 학원비는 아깝지 않다. 내년부터는 배심제를 혼합한 국민참여형 재판까지 도입되기 때문에 내친 김에 말솜씨를 닦아 놓기로 했다.
자신만의 전문 분야를 구축하려는 변호사들도 부쩍 늘었다. 변호사 1만명 시대에 더 이상 형법 민법만 알아서는 ‘먹고 살기’가 어려울 수 있다.
공판중심주의 등으로 즉석에서 변론을 해야 할 경우가 많을 텐데 아무래도 전문 지식이 없으면 힘들다. 대한변호사협회가 1년에 6,7 차례 개설하는 특별강좌는 최근 들어 인기 폭발이다. 금융 세무 의료 지적재산권 행정소송 등 특정 주제에 대해 10시간 동안 판사나 전문가를 불러 강의를 듣는다.
이전에는 한 강좌당 200~250명이 신청해 정원 300명에 못 미쳤지만 요즘엔 접수를 받기 시작한 당일 마감을 해야 할 정도다. 전문 사설학원을 찾는 변호사,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에도 실력을 쌓기 위해 다시 고시학원을 찾는 사법연수생들도 늘고 있다.
판ㆍ검사들도 고민이 많아졌다. 서울의 한 검사는 “과거에는 피고인을 구속 기소하면 검사 역할의 90% 이상이 끝났다고 봤는데 이제는 기소 후 공소유지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며 “피고인을 수사했던 검사가 직접 법정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다른 수사는 뒤로 미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모 판사는 “공판중심주의가 본격 도입되면 판사의 역할이 커진다. 쟁점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라도 많은 개입이 필요하다. 순발력과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법정에서 공방을 지켜보기만 했던 판사들이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고 말했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
■ '공판중심주의 첫 재판' 변호 맡았던 김영갑 변호사 인터뷰
지난해 1월 기소된 서울 강동시영아파트 재건축 조합장 비리사건 재판은 공판중심주의의 실험장이었다. 수사기록에 의존했던 기존 재판의 틀을 깨고 관련자들의 법정 진술에 의존하는 재판이 진행되면서 공판중심주의가 본격적으로 시행될 경우의 장점과 단점을 미리 보여주었다.
특히 법원이 검찰이 청구한 핵심 관계자의 영장을 3차례나 기각하고 검찰은 재판 개시 전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는 등 법원ㆍ검찰의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피고인의 변호를 맡아 검찰의 수사기록 미제출에 대해 헌법 소원을 냈던 김영갑(49) 변호사는 “한 달간 재판이 12번 이뤄져 기록검토, 심문사항정리, 당사자 상의 등 다른 사건보다 3배 정도 품이 더 들고 밤샘은 예사였다”며 “재판 시간도 평균 5~6시간이 걸려 다른 사건은 거의 못 보았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공판중심주의가 제대로 되려면 법정에서 피고인이 의견을 주장할 절차가 보장돼야 한다”며 “이를 위해 사전에 검찰은 변호인과 피고인측에 수사 자료를 복사하거나 열람할 수 있게 해 법정에서 제대로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법률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변호사를 선임할 때 법관과의 친소 관계나 연고보다는 법정에서 당당하게 방어권을 행사할 실력을 갖췄는지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김 변호사는 조언했다.
그는 “피고인은 억울한 감정을 앞세우게 되면서 사안의 쟁점 등을 파악하기 어렵고, 구속상태라면 수사기록 입수와 증인 선택에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며 “사안의 쟁점 파악에 능하고 전달력이 좋은 변호사들을 선임하는 것이 승소의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박상진 기자 oko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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