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편집국에서] 논술 사교육의 놀라운 役事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편집국에서] 논술 사교육의 놀라운 役事

입력
2006.09.28 23:58
0 0

아버지가 경남지역의 공무원인 고3 A군은 매달 둘째 넷째 토요일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서울행 고속열차를 탄다. 23일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5시간밖에 못자는 수험생이라 졸만도 한데 그는 열차에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책을 펴놓았다.

A군이 펼쳐 놓은 책은 최근 수험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논술입시서다. A군은 중요한 곳에 밑줄까지 치면서 내용을 외우고 또 외웠다.

해 질 무렵 A군은 영등포역에 내렸다. 역 앞에는 OO학원이라고 적힌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양천구 목동의 한 논술학원이 이 시각 도착하는 지방 수강생들을 위해 보낸 버스다. A군이 마지막으로 버스에 오르자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30분 후 이들은 6층짜리 건물 앞에 도착했다. 3층 논술학원에는 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다. 이곳에서 지방 수험생 30여 명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토요일 집중수업이 진행된다.

이들은 강의실에 들어가 A군이 아까 열차에서 공부했던 논술입시서를 꺼내 놓고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강의는 '논술 구성요령'에 관한 것이었다. 강사는 논술 문제를 유형별로 나눠 어떻게 글을 구성하는가를 가르쳤다.

A군은 자정이 다 돼 지칠 대로 지친 표정으로 학원을 나섰다. 그런데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인근 모텔로 옮겨 잠을 청했다. 오전 7시에 모텔에서 나온 A군은 전날 갔던 논술학원으로 다시 향했다.

일요일 강의를 듣기 위해서 였다. 이날 수업은 구체적인 문제 중심으로 진행됐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에 오른 것은 오후 7시가 넘어서 였다. A군은 이번 추석에도 특강을 듣기 위해 상경할 계획이다.

서울의 유명 논술강사 B씨는 요즘 지방강좌투어를 갖고 있다. 서울의 논술학원에 가지 못하는 지방 수험생들을 상대로 주중 수업을 하는 것이다. 매주 화~목요일 사흘간 10회의 강의는 모두 만원이다.

그는 "수강료가 서울보다 조금 비싸지만 토요일과 일요일 상경 수강할 경우 숙박비와 교통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오히려 저렴한 편"이라며 "바쁜 수험생들이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각 대학들이 2008학년도 입시안을 발표하면서 교육인적자원부의 내신 위주 입시 원칙을 어기고 논술 비중을 지나치게 확대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학교에서는 논술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 각 대학이 논술 비중을 높이자 "논술 사교육 시장만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쏟아 졌다.

이런 와중에 서울대는 24일 2006학년도 정시모집 인문계 합격자의 지역별 논술 성적(25점 만점)을 공개했다. 경남이 23.56점으로 1위였고 서울은 23.49점으로 6위에 그쳤다. 서울대 관계자는 "서울보다 지방 학생의 평균이 오히려 높았다는 사실은 학원 논술교육이 큰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논술학원을 다닌 수험생이 전혀 유리하지 않으므로 논술 비중을 높여도 논술 사교육 비대화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함정이 숨어 있다. 지방 수험생이 논술 사교육을 이용할 기회가 거의 없다고 전제한 것이다. A군이나 B씨의 사례에서 보듯 이는 사실이 아니다.

논술 사교육의 '놀라운 역사(役事)'는 은혜롭게도 지방까지 촉촉하게 적시고 있다. 특히 상위권 수험생들에 대해서는 지방의 학부모들도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논술 사교육을 시키고 있기 때문에 지방과 서울 수험생간의 기회 차이는 더욱 미미하다.

따라서 '지방 학생은 논술 사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집단인데도 서울 학생보다 논술 점수가 높았다'는 서울대의 결론은 타당하지 않다.

서울대가 논술 옹호론을 펴려면 더욱 명쾌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이은호 사회부 차장대우 leeeunh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