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가리켜 흔히들 ‘역마살이 끼었다’라는 표현을 쓴다. 역마살이 낀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이 사회 혹은 조직과 불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떼를 지어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없다. 얼핏 생각해보면 집시나 히피들이 이 부류에 속할 듯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 만도 않다. 이들은 심지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외로움을 느끼는 타입이다.
역설적인 표현이 되겠지만 이들은 홀로 있을 때 그나마 가장 덜 외롭다. 20세기 전반부를 대표하는 영국의 산악인 겸 탐험가 에릭 십튼(1907~1977)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의 거침없는 자유와 놀라운 용기 그리고 천형 같은 외로움이 절절이 느껴진다.
에릭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유년시절부터 방랑자의 삶을 살아왔다. 그는 1907년 스리랑카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곳에서 차 재배농장을 경영하던 그의 아버지는 에릭이 세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누나와 함께 어머니를 따라 인도와 유럽 전역을 떠돌아 다녔다. 그렇게 현대판 집시 같은 생활을 하다 보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봤을 리 없다. 어느덧 아홉 살이 되자 더는 정규교육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그를 런던에 있는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런던의 초등학교 교사들은 에릭에게 ‘실독증세’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다.
실독증이란 문자를 보고서도 발음을 연상할 수가 없는 일종의 문맹 상태를 뜻한다. 결국 그는 영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국인 학교에서 수업을 받아야 하는 ‘왕따’의 처지가 된다. 사회로부터의 일탈 혹은 사회와의 불화는 이미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내 이미지 속의 에릭은 지구가 좁다면서 온 세상을 쏘다닌 통 큰 남자였다. 하지만 에릭의 전기 작가들은 하나 같이 그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평생 동안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산악인 혹은 탐험가에게 학력을 따진다는 일 자체가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등반사를 들여다보면 그들의 이런 지적에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이루어진 등반과 탐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주역들은 대부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최고의 학벌을 갖추고 있는 ‘영국 신사’들이었다. 그런 뜻에서 에릭은 결코 ‘영국 신사’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하여 수 차례 시험을 치렀으나 번번히 낙방하고 만다.
에릭의 본격적인 등반 인생은 열 아홉 살 때 알프스에서 시작된다. 그는 암벽과 빙설벽에 두루 능한 산악인이었다. 하지만 재력이 뒷받침 되어주지 않는 한 생업을 도외시하고 등반만을 일삼을 수는 없다. 마땅히 내세울만한 학력을 갖추지 못한 가난한 영국 청년에게 선뜻 일자리를 내줄만한 회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에릭은 결국 식민지인 아프리카를 선택한다. 아프리카 케냐의 커피농장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계급 질서는 엄격하다. 당시 정착해 있던 농장 주인들은 대부분 부유한 집안의 2세들이었던 것이다. 변방의 식민지에서조차 외톨이가 되었던 에릭에게 유일한 즐거움이란 아프리카의 산들이었다. 그는 마운트 케냐에 오르고 우간다의 국경을 탐험하면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고상한 영국 신사들의 사회’에 숨 막혀 하던 산악인 겸 탐험가가 한 명 더 있었다. 에릭 십튼보다 10년 연상이었던 빌 틸먼이다. 두 사람은 곧장 의기투합하여 아프리카의 모든 험산들을 오르내린다. 킬리만자로와 마운트 케냐 그리고 루웬조리가 이들의 발 아래로 떨어진다.
훗날 ‘세계 최고의 자일파트너’로 손꼽히는 ‘십튼-틸먼’ 콤비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들이 ‘알파인 저널’과 ‘지오그래틱 저널’에 실은 아프리카 등반기는 당시 세계 산악계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알파인클럽’(영국산악회)으로부터 격찬을 받고, 덕분에 이들은 이제 막 새로운 문을 열어 젖힌 히말라야 등반의 주역으로 간택받게 된다. 1933년, 에릭은 불과 스물 여섯의 어린 나이로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이 된다. 변방의 왕따가 세계 산악계의 젊은 기대주로 떠오른 것이다.
이후 에릭 십튼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 자체로서 세계 등반사의 주요 항목이 된다. 그는 인도의 카메트, 가르왈 히말라야의 난다 데비, 카라코람의 트랑고 산군, 타클라마칸 사막, 에베레스트의 노스콜,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 등 당시까지 ‘지도의 공백지대’로 남겨져 있던 모든 극지와 오지들을 종횡무진 쏘다닌다.
전설 속의 히말라야 설인 예티의 발자국을 처음으로 촬영한 것도, 에베레스트 8,300m 지점에서 조지 리 맬러리의 피켈을 발견한 것도, 저 웅장한 화강암 암탑의 극치 트랑고 타워를 세상에 알린 것도 모두 그였다. 하지만 불세출의 산악인으로서 명성을 얻었다고 하여 사회와의 불화마저 종식된 것은 아니다. 그는 언제나 주류 산악계와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 심각한 불이익 조치를 당한 적도 많다.
“나는 나의 삶을 살아왔을 뿐입니다.” 만년의 자서전에서 에릭은 고백했다. “내 삶에 대한 평가는 ‘그들’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오직 ‘영국 신사’들만이 오를 수 있는 명예의 전당에 들었으되 가난한 방랑자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 고집불통의 사나이는 결국 1965년 알파인클럽의 회장으로 피선된다.
전립선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76년, 부탄 트레킹을 다녀온 직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지구 위에는 미답의 땅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곳들을 떠올리면 언제나 가슴이 뜁니다.”
■ 에베레스트 새 루트 개척 업적에도 군대식 대규모 원정대 못견뎌 불화
에베레스트의 초등자들은 에릭 십튼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만큼 에릭은 에베레스트에 수 없이 도전했고 그곳에 오르는 길을 닦았다. 1933년의 원정에서 그는 8,300m까지 올라 맬러리의 피켈을 발견했다. 1935년에는 정찰등반대장으로 활약했고, 1936년에는 원정대원으로 참가했다. 1951년 네팔이 개방되자 남측으로부터의 등반이 가능해졌는데, 이때 정찰대장이었던 에릭이 선발한 대원이 바로 훗날 초등자가 된 에드문드 힐러리였다. 최초로 고락셉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칼라파타르에 올랐으며, 웨스트 쿰부에서 등반 가능한 루트를 찾아낸 것도 에릭이었다.
1952년 에릭은 에베레스트 대비 훈련차 초오유 등반대를 맡는다. 하지만 그들은 6,900m 지점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대원들 간의 불화가 발생했다. 영국 에베레스트 위원회는 이것을 빌미 삼아 에릭의 리더십에 의문을 표시한다. 아마도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군대식 조직생활을 선천적으로 못 견뎌 하는 그의 개인주의적 기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릭은 본국으로부터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곧장 귀국하지 않고 대원들 일부를 이끌고 에베레스트 동부지역을 탐사한다. 본국의 ‘영국 신사’들이 불 같이 화를 내었음은 당연한 결과다.
1953년의 원정대장은 본래 에릭 십튼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영국 에베레스트 위원회는 갑자기 새로운 카드를 들이민다. 충직한 군인으로서 보병 연대장으로 근무하던 존 헌트를 공동대장으로 내세운 것이다. 세부 조항으로 들어가면 더욱 치욕스럽다. “베이스캠프까지는 공동대장, 그 이후의 등반은 존 헌트가 대장”이라는 것이다. 애당초 존 헌트를 부대장 정도로도 여기지 않았던 에릭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불문가지다. 그는 미련 없이 원정대장직을 자진사퇴하며 뼈 아픈 한 마디를 남겼다. “군대식의 대규모 원정대는 등반의 본질을 왜곡시킬 뿐이다.”
산악문학작가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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