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중심주의의 가장 큰 목적은 피고인이 방어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보장하자는 것이다. 민사재판의 구술(口述)주의 역시 재판부가 소송 당사자들의 주장을 직접 듣고 판단해야 한다는 데 목적이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말을 빌리면 “사건 당사자의 숨결을 재판부에 전달할 수” 있다.
여기 아내를 살해하도록 지시한 혐의(살인교사)로 수사를 받고 있는 A씨가 있다. 실제 살인을 저지른 B씨와는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다. B씨는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해 A씨한테서 지시를 받았다고 검찰에서 진술했을 수 있다. A씨는 당연히 자신의 혐의를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B씨와의 관계를 묻는 검사의 질문에는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말할 것이다.
검찰은 B씨뿐 아니라 A씨 부부 주변 인물들을 조사한 뒤 그들의 답변을 근거로 A씨에게 질문을 던진다. A씨는 이들이 어떻게 진술했는지 모른다. 처음 검찰청에 불려온 터라 심장은 터질 것 같다. A씨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 대답한 것이 법원에 결정적인 근거로 제출될 수 있다.
A씨에게 유리한 참고인 진술은 검찰이 법원에 제출하지 않을 수도 있다. 법원은 검찰이 제출한 기록을 모두 검토한 후 재판을 시작하기 때문에 A씨가 법정에서 부인하더라도 유죄가 선고될 수 있다. A씨가 검찰에서 아무 진술을 하지 않았어도 법원은 다른 사람들의 진술을 근거로 유죄 심증을 굳힐 수 있다.
공판중심주의가 강화되면 피고인은 위축된 분위기를 벗어나 공개된 법정에서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다. 법원도 검찰의 공소장만 받아본 터라 백지상태에서 판단하게 된다. 증인들의 증언을 전부 들은 뒤 가장 마지막으로 피고인을 신문한다. 피고인을 먼저 신문하면서 거짓말을 하는지부터 살폈던 과거 재판과 다르다.
그전에는 검사와 변호사가 “몇 월 몇 일 어디서 누구의 소개로 B씨를 만난 적이 있지요? 그 자리에서 이러이러한 얘기를 나눴지요?”라고 물으면 “예” “아니오”로만 답했지만 이제는 “B씨를 어떻게 알게 됐나요?”라고 질문이 짧아지고 그 대신 대답이 길어진다. 피고인의 입장에서는 검찰에서 진술을 거부하고 법정에서 진술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 진술 거부권은 헌법에 보장돼 있다.
민사사건을 보자. 그동안 소송 당사자가 재판장의 얼굴을 한 번도 못 보고 재판이 끝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법원은 변호사가 작성한 서류만을 바탕으로 판단했다. 법원은 원고 측 변호사에게 권유한다.
“이대로 선고까지 가면 불리할 수 있다. 합의를 보는 게 어떠냐”라고. 이 권유는 피고 측 변호사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렇게 조정이 성립되는 경우가 많다. 원고와 피고 모두 억울해 한다. 하지만 이를 호소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구술주의 재판에서는 본격적으로 다투기 전에 자신의 주장을 재판부에 피력할 기회를 얻는다. 재판부는 정제된 서면을 통해서는 알 수 없었던 허점을 이들의 진술 속에서 발견한다. 재판을 지켜보는 방청객들도 어느 정도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소송 당사자들은 주장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패소하거나 조정을 당하는 것보다는 덜 억울하다.
김지성 기자 jskim@hk.co.kr
■ 하태훈 교수 인터뷰/ "증거 철저히 분석해야"
“공판중심주의는 수 십년간 우리 법전에 잠자고 있던 피고인의 권리구제 방편을 뒤늦게 꺼낸 것입니다. 이제부터 법정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도 말하고 증거, 증인신청도 하십시오”
지난 해 7월까지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기획연구팀장을 맡았던 하태훈 고려대 교수(47ㆍ법학)는 최근 화두로 떠오른 공판중심주의의 당사자가 될 법률 소비자들에 이렇게 조언했다.
하 교수는 “지금까지 민ㆍ형사 재판은 모두 수사기관의 조서가 법관의 심증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공판중심주의와 구술주의가 실현되면 공개된 법정에서의 공방을 통해 재판부가 심증을 형성하기 때문에 당사자의 적극적 자기변론이 필요해진다”고 강조했다.
하 교수는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일방적 자기주장보다는 상대방 증거에 대한 철저한 파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공판중심주의와 더불어 ‘증거개시제’가 실시되면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증거를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증거개시제는 공판 전 준비과정에서 소송 양 측의 증거를 모두 공개하는 제도다. 공판중심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미국 등 사법 선진국들은 이런 절차를 밟고 있다는 것이 하 교수의 설명이다.
공판중심주의가 이루어지면 소송이 지연되고 비용이 늘어난다는 지적에 하 교수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조서위주 재판이 오히려 비정상”이라며 “지금보다 소송이 지연되겠지만 법률 소비자들로서는 충실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자신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법정에서 하고 난 후 결과를 접하면 억울함이 없어져 항소율이 낮아질 수 있다”며 소송비용 증가설을 일축했다.
박상진 기자 okome@hk.co.kr
■ 수사단계 진술거부 악용땐 '큰 코'
피의자가 수사 단계에서 진술 거부권을 악용하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일단 혐의가 명백할 경우 범죄 사실을 자백하는 게 피고인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검찰은 충고한다. 법원의 선고는 검찰의 구형(求刑)을 바탕으로 이뤄지는데 피의자가 수사에 협조하면 검찰의 선처를 바랄 수 있다는 것이다. 법원도 혐의를 시인하는 피고인에 대해서는 재판부 재량으로 법정 형의 절반까지 형량을 줄여줄 수 있다. 수사나 재판을 받는 기간이 단축된다는 이점도 있다.
특히 고소ㆍ고발 사건에서는 적극적인 변론이 중요하다. 고소ㆍ고발 사건은 민사소송과 유사하기 때문에 진술을 거부할 경우 수사기관은 아무래도 상대방의 입장에 치우쳐 판단할 수밖에 없다. 무혐의 처분을 받을 수 있는데도 진술을 하지 않으면 법정에 설 수 있다. 고소ㆍ고발 사건은 전체 형사사건의 70% 이상 차지한다. 또 교통사고나 폭력사건에서도 수사 단계에서 적극적인 반론을 펴는 게 도움이 된다.
사건 관계자나 목격자가 법정에서 증언할 때에도 주의를 요한다. 형법 152조는 법률에 따라 선서한 증인이 허위로 진술한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의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실제 법정에서 허위로 증언했다가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은 2003년 1,208명에서 지난해 1,669명으로 증가했다. 민사재판에서 위증을 해도 소송 상대방에 의해 고소될 수 있다.
사법방해죄와 참고인 구인제도가 도입되면 수사기관에서 허위 진술한 참고인도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이 제도들은 공판중심주의 강화에 따른 수사권 약화를 막기 위해 현재 논의되고 있다.
대검의 한 검사는 “공판중심주의가 본격 시행된다고 무조건 수사기관에서 진술을 하지 않는 게 유리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법방해죄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때 거짓말을 하면 처벌하는 제도다. 현행 법상 법정에서 선서를 한 뒤 거짓말을 하면 위증죄로 처벌 받지만 수사 단계에서 거짓말을 한 경우엔 처벌 받지 않는다. 미국에서 시행 중이며 독일에도 유사한 개념이 있다. 김성호 법무부장관은 사법방해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참고인 구인제도
수사에 필요한 증인 등 참고인을 수사기관이 강제로 소환하는 것을 말한다. 법원은 증인이 법정에 나오지 않으면 영장을 발부해 구인할 수 있으나 수사기관에게는 이 같은 권한이 없다. 다만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실시되고 있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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