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이탈리아의 알코에서 개최된 국제 스포츠클라이밍대회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이 집중된 부문은 여성부 결승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호들갑 떨기를 좋아하는 언론들은 이 결승전에 ‘구대륙과 신대륙의 격돌’이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갖다 붙였다. 구대륙이란 물론 유럽을 의미하고 신대륙이란 아메리카를 의미한다.
당시 유럽을 대표하여 결승전에 오른 여성 클라이머는 프랑스의 카트린느 데스티벨, 그리고 미국 출신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대표하여 결승전에 오른 여성 클라이머는 린 힐(45). 이 둘은 거의 동년배(린 힐이 1년 늦게 태어났다)인데다가, 빼어난 미모와 늘씬한 몸매를 갖추었고, 남성들을 압도할만한 등반 솜씨를 지녔다는 점에서 마치 거울의 양면과도 같은 존재였다.
결승전의 열기는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웠다. 카트린느가 홀드를 바꾸어 잡거나 린이 체중을 옮겨 실을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탄성과 신음이 터져 나왔다. 순수한 등반능력만을 놓고 보자면 린이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카트린느가 수 차례의 시도 끝에 포기한 구간을 린이 단 한 순간의 동작만으로 돌파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승은 카트린느에게 돌아갔다. 린이 당시 막 개정되었던 새로운 규칙을 숙지하지 못하여 그만 실격 처리되고 말았던 것이다.
유럽의 언론들은 환호성을 질러대며 카트린느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고, 린에게는 패배의 소감을 물으며 마이크를 들이댔다. 결코 흥분하지 않는 성품으로 유명한 린은 빙긋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카트린느에게 전해줘요, 내년에 다시 만나자고.”
카트린느와 린은 여러 모로 대조를 이루는 캐릭터들이다. 카트린느가 천부적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면 린은 지독한 노력형이다. 카트린느가 매스컴 앞 포즈 잡기를 능숙하게 해낸다면 린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관중이나 카메라는 의식하지 않아요. 완벽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나의 동작 하나 하나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내가 펼치는 승부의 원칙이죠.”
린은 자신이 해낼 수 없는 동작을 발견하면, 그 동작을 철저히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과학적 훈련방법을 창안해낸 후, 끝내는 기어코 그 동작을 마스터해내는 집요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그런 린이 카트린느와의 승부를 단판으로 접었을 리가 만무하다.
린은 카트린느를 찾아 프랑스로 날아간다. 하지만 같은 해에 열린 프랑스 세계선수권대회에 카트린느는 출전하지 않았다. 린은 이 대회에서 보란 듯이 우승컵을 거머쥐었지만 카트린느와의 대결이 생략된 우승이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두 여성이 다시 한번 정상에서 격돌한 것은 1987년 프랑스 그르노블 세계실내암벽대회였다. 이 대회에서는 카트린느가 경계선 밖으로 발을 디뎌 실격처리 되고 린이 우승한다. 이제 겨우 1대 1인 셈이다.
이후 두 여성은 전세계의 실내암벽대회를 번갈아 석권한다. 보다 많은 우승컵을 끌어안은 사람은 린 힐이다. 하지만 1989년 이후 카트린느는 알프스와 히말라야로 달려가 버렸으므로 더 이상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가장 매혹적인 라이벌을 잃어버린 린 힐은 다소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즐거운 흥분을 맛볼 수 없게 되어 서운하네요.”
린 힐은 1961년 미국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 모두가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이후 산타 모니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그곳에서 자라났다. 14세 때 조수아트리에서 암벽등반에 처음 접했고, 16세 때 요세미티로 진출했으니 소녀 시절에 이미 제 앞길을 결정해버린 셈이다.
그녀는 체조에서 요구되는 기술과 지식을 암벽등반에 접목시키는 자신만의 트레이닝 기법을 개발하여 빠른 속도로 등반능력을 키워나갔다. 요세미티에서 만난 존 롱은 그녀의 첫사랑이자 믿음직한 등반 파트너였다. 린은 20세가 되기 전에 존과 더불어 5.12d 급 등반을 해낼 만큼 무서운 신예로 성장했다. 그녀가 요세미티와 캘리포니아를 떠난 것이 존 롱과의 이별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냥 캘리포니아에 싫증이 났다고 해두죠. 뉴욕으로 이사를 간 것은 물론 그 근처에 샤왕겅크스가 있기 때문이에요.”
1980년대 중후반은 린 힐의 시대였다. 그녀는 전세계를 떠돌며 실내암벽대회의 우승컵들을 수집했고, 샤왕겅크스에 새로운 루트들을 개척했으며, 여성 최초로 5.14급 클라이머가 되었다. 린 힐은 실내암벽대회를 공정하고 인기 있는 스포츠로 정착시키는 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해낸 여성 클라이머로 평가된다.
그녀는 한 번의 결혼과 이혼을 제외하고는 매우 절제된 삶을 살아왔다. 2002년에 출간된 그녀의 자서전 ‘클라임 프리: 나의 수직의 삶’은 명백히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한 사람의 여성 스포糖퓽막?살아 남고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아요. 오직 노력하는 인간만이 살아남는 거죠. 클라이밍 분야라고 해서 다를 건 없어요. 인내심, 집중력, 그리고 과학적 훈련만이 승패를 가름하죠.”
■ 요세미티 엘캡 노즈 하루만에 자유등반 "최초의 여성 아닌 최초의 인간"
린 힐이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여성 스포츠 클라이머라는 사실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녀가 언제나 실내에 꾸며진 인공암장에서만 등반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린 힐은 ‘세계등반사 100대 사건’에 자신의 이름을 등재한 몇 안 되는 여성들 중의 하나인데, 그녀가 세운 대기록은 미국 요세미티 엘캐피탄의 노즈 루트를 단 하루 만에 자유등반(확보물에 의지 하지 않은 채 자신의 힘만으로 오르는 등반 방식)으로 올랐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까지 그 어떤 남성 클라이머도 해내지 못한 놀라운 쾌거였다.
린 힐이 노즈를 자유등반으로 돌파해낸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녀의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이 잘 드러난다. 그녀는 노즈를 수 차례 오르내리며 자유등반에 필요한 동작들을 계산해내고 그것을 완전히 마스터할 때까지 치밀하게 반복했다. 특정한 근육을 강화시키고 순간적인 파워를 내기 위하여 과학적인 트레이닝을 반복했음은 물론이다. 이후 수 차례의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코스를 완전히 숙지한 다음 1994년 9월 19일 밤 10시부터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했다. 그녀는 스티븐 셔튼의 확보를 받으며 23시간 동안 쉬지 않고 모든 피치를 앞장 서서 자유등반(오직 그레이트 루프 피치만 인공등반)한 끝에 마침내 이튿날 밤 9시에 엘캡의 정상에 섰다.
놀라운 사실은 노즈 자유등반을 마친 직후의 그녀가 조금도 지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별다른 부상을 입지도 않았고 체력이 소진되지도 않았다. 다만 예의 그 차분한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싼 매스컴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 빙긋 미소 지었을 뿐이다. 멍청한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여성 최초로 엘캡 노즈를 하루 만에 자유등반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린 힐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최초의 여성이 아니라 최초의 인간이지요.”
산학문학작가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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