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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29> 戱文의 우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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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29> 戱文의 우아함

입력
2006.09.20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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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无涯) 양주동(1903~1977)을 흔히 국어국문학자라 이르지만, 그가 국어국문학 연구에 매진한 것은 일제 말기 예닐곱 해에 지나지 않는다. 무애는 그 길지 않은, 그러나 집중적인 정진에 기대어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ㆍ일명 ‘사뇌가 전주’ㆍ1942)와 ‘여요전주’(麗謠箋注ㆍ1947)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그의 다른 한국학 논문들은 이 두 저서의 우수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예닐곱 해를 뺀 나머지 세월을 무애는 시인으로, 영문학 또는 국문학 교사로, 번역가로, 무엇보다도 주도(酒徒)의 일원으로 살았다. 그리고 명정(酩酊)의 힘으로 이따금 줄글을 써내려 갔다.

그것은 무애가 어린 시절부터 소망하던 삶의 형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연북록’(硏北錄)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향가 연구를 되돌아보며, 그는 “어려서부터 평소의 야망은 오로지 ‘불후(不朽)의 문장’에 있었으매, 시인 비평가 사상인(思想人)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말하자면 무애는 문장가가 되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뤘다. 그의 ‘문장’을 또렷이 내비치고 있는 텍스트는, ‘조선고가연구’와 ‘여요전주’ 뒤에 붙은 평설들을 제외하면,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ㆍ1960)와 ‘인생잡기’(人生雜記ㆍ1963)에 묶인 수필들이다. 토씨를 빼고는 온통 한자투성이인 한국학 논문들만이 아니라, 시집 ‘조선의 맥박’(1932)과 그 밖의 편서, 역서들도 그의 문장을 넉넉히는 보여주지 않는다.

‘문주반생기’는 ‘신태양’ ‘자유문학’ 따위의 잡지에 연재한 회고록이다. ‘유년기’(幼年記), ‘술의 장(章)’, ‘청춘백서’(靑春白書), ‘여정초’(旅情抄), ‘학창기’(學窓記), ‘교단 10년’의 여섯 장으로 나뉜 이 책에서, 무애는 자신의 반생을 대체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되돌아보고 있다. ‘인생잡기’는, 그 후기에 따르면, “수상(隨想) 만감(漫感) 잡기(雜記) 등 필흥(筆興)에 맡긴 문자를 써서 발표한 것 중에서 하치않은 것을 다시 할애(割愛)하고 그 상(想)이나 필치에 있어, 내지 그 글을 쓰게 된 기연(機緣)과 내용에 있어 내딴에 회심의 미소, 칭의(稱意)의 탄상(嘆賞), 내지 감개로운 회고를 지을 만한” 글을 추려서 한 책으로 모아놓은 것이다. ‘신변초’(身邊抄) ‘정원집’(情怨集) ‘수상록’의 세 장으로 이뤄져 있다. 말하자면 앞의 책과 달리 글을 주제와 성격별로 벌여놓았다.

그러나 ‘인생잡기’ 역시 ‘문주반생기’처럼 글감을 필자 주변에서 취한 가벼운 글 모음이라는 점에서, 두 책은 서로 자매서(姉妹書)라 이를 만하다. 게다가 ‘인생잡기’에는 ‘문주반생기’에 먼저 실렸다가 옮아온 글도 있고, 글을 고스란히 옮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같은 에피소드를 살짝 다르게 서술한 글들이 보인다. 특히 저자가 첫 번째 결혼과 두 번째 결혼 사이에 겪은 소설가 강경애(1906~1943)와의 연애는 정감 짙은 언어로 두 책에서 거듭 회고되고 있다. 그 글의 제목은 ‘춘소초’(春宵抄)다. 봄밤의 이야기인 것이다.

무애를 읽어보지 못한 젊은 독자들도, 이쯤엔 이미, 그의 걸쭉한 한자 취향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 세대의 지방 출신 지식인에게는 별난 일도 아니었지만, 무애의 몸에 맨 처음 새겨진 교양은 한학이었다. 그의 부모는 둘 다 지식인이었고, 어린 무애는 부모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그 부모는 무애가 철나기도 전에 차례로 작고했고, 이 천애고아는 그 뒤 독학으로 중국 고전들을 섭렵했다. 소년 무애가 걸출한 기억력으로 게걸스레 빨아들인 중국 고전의 세계는 뒷날 그의 문장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무애는 대학에서 불문학과 영문학을 공부하며 그 쪽 문헌에 적잖이 접했지만, 그의 한국어 문장은 평생 의고투(擬古套)를 곧, 한문 번역투를 벗어나지 못했다. 벗어나지 못했다고 쓰는 것은 적절치 않을는지 모른다. 그는 거기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을 테다. 그 자신, ‘한자 문제’라는 글에서, “아닌게아니라, 내 글에는 한자어가 많고 벽자(僻字)조차 수두룩함이 사실이다. 어려서 한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일상 용어에 한자어를 남보다 더 많이 쓰는 버릇이 있으니, 문장이 또 그럴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술회하고 있기도 하다.

무애의 한국어 문장에는 여느 한문 문장에서 사람들이 연상하는 모든 장점과 단점이 버무려져 있다. 장려함, 호방함, 우아함, 허세, 과장, 과시벽 같은 것들 말이다.

그의 문장은 그보다 두 살 위인 함석헌의 문장과 대척에 있다. 함석헌의 문장이 구어를 향해 한껏 달려갔다면, 무애의 문장은 문어 쪽에 바짝 붙어있었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의 문장에는 눈길을 끄는 공통점이 있다. 극도로 불안정한 한국어에 노출된 채 글쓰기를 시작한 세대의 문장답지 않게, 문법적 단정함을 신경질적으로 추구했다는 점이다.

무애의 문장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을 개성적 문장이다. 그 개성은, 부분적으로, 그가 한문 교양을 깊이 체득한 채 한국어로 글을 쓴, 우리 역사에서 폭이 매우 좁은 세대에 속한다는 점에서 온다. 무애 문장의 이 한문적 우아함은 그의 시에서도 설핏 드러나고, 그의 서양시 번역에서도 흔적을 보인다. 무애의 수필은 박람강기의 문장이다. 고금동서의 문장들과 에피소드들이 자유자재로 인용되고 풀이된다.

그런 인용들은, 때로, 글의 맥락에 봉사한다기보다 저자의 과시벽에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벽자 취향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국보’라 일컬었던 사람답게, 무애에게는 과시벽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러 그 과시벽을 희화화함으로써, 다시 말해 자신을 조롱함으로써, 내면의 균형을 맞추었다.

무애의 문장이 삶이나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의 수필들은, 그의 한국학 논문들처럼, 주로 지식과 교양의 우물일 뿐이다. 그저 말놀이에 탐닉하는 글들도 적잖이 있다. 무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문주반생기’ 후기에서, 자신의 글을 ‘희문’(戱文)이라 규정했다. “‘문학’이란 워낙 단순한 ‘문자의 놀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대단한 무엇, 야무진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데, 이 ‘글’이 과연 얼마나 그렇게 풍류로운 채 진지하고 얄팍한 양 깊숙한 ‘삶’의 기록, 내지 그 ‘반성’과 ‘해석’이었는지 그것은 내사 모르겠다.

처음부터의 의도가 무슨 굉장한 ‘입언’(立言)이 아닌 단순한 희문이었고 따라서 ‘글’이 ‘사실’보다도 우위였음이 나의 구구한 핑계요 해조(解嘲)라 할까.” 또 ‘인생잡기’ 후기에서 다시 인용한 ‘무애 시문선’ 후기에서도 이런 ‘희문’의 자의식이 되풀이된다. “거지반 내가 즐기는 이른바 ‘희문’으로 쓰여진 것이라, 매양 재치가 앞선 반면에 사색을 깊숙이 침전시키지 못했음이 한(恨)이나 독자는 거기서 여하간 ‘생의 미소’와 ‘문장의 묘(妙)’를 얻으리라 생각한다.”

어쩌면 무애는 말 자체에 빠진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말들의 장르나 거기 접근하는 방식은 여러 겹이었다. 한문과 유럽문학의 벽호(癖好)에서 시 창작을 거쳐 고대와 중세 한국어 연구에 이르기까지. 그는 또 소설 습작기에 ‘청춘’ ‘황금’ ‘희생’ 3부의 ‘거작’ 장편소설을 구상했으나 끝내 시작도 하지 못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 전말을 그린 ‘문주(文酒)의 벗들’이란 글의 ‘3부작 장편’ 대목은 전형적 ‘희문’이다.

소설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까 궁리하느라 동서 고전의 첫줄을 살피던 무애는 마침내 밀턴의 ‘잃어버린 낙원’이 전치사로 시작하는 것을 발견한다(“Of Man's first disobedience and that fruit/ Of that forbidden tree…”). 그래서 이를 좇아, 서양말 전치사에 해당하는 우리말 조사 ‘가, 를, 의, 에, 와, 는, 아…’ 따위를 늘어놓고 심량(深量)하다가, 이내 소설 쓰기를 단념했다는 얘기다.

만년의 무애가 방송에 출연하며 ‘만담가’가 된 것도 말을 향한 욕망의 드셈 탓이었을 게다. ‘방송인’ 양주동은 더러 그 ‘다변의 주책없음’으로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의 애독자로서, 나는 그의 만년 기억이 안쓰럽다. 그러나 그 주책없음은 그의 순수함, 무구함의 뒷면이었을 테다. 박학과 자대(自大), 장설(長舌)과 방송 활동 등으로 흔히 그와 비교되는 도올 김용옥은 그 점에서 무애보다는 한결 셈속이 깊어 보인다.

‘문주반생기’와 ‘인생잡기’는 읽어볼 만한 책이다. 무애 아니면 쓸 수 없는 문장을 대하는 기쁨 때문에도 그렇고, 거기 그려진 1920~30년대 한국 문단 풍경을 엿보는 재미 때문에도 그렇다. 사실 그 문단풍경은 무애 자신의 내면 풍경과 한가지일 것이다. 무애의 글에서, 당대 한국문단은 필자의 주관이라는 필터에 걸러지며 꽤나 일그러진 듯 보이기 때문이다. 1926년 가을 어느 날의 한 문인 좌담회 전말을 그린 ‘영도사(永導寺) 좌담회’는 쓴웃음을 유발하는 ‘희문’이지만, 한 편의 풍자소설로도 읽힌다.

무애는 이 좌담회에서 동료 문인들에게 한국어 삼인칭 대명사를 남성은 ‘놈’으로 여성은 ‘년’으로 쓰자고 제안했다 한다. ‘글’이 ‘사실’보다 우위였다는 무애의 고백대로, 어쩌면 그의 수필 상당수는 허구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애는 소설가의 꿈을 이룬 셈이다.

▲ '문주반생기' 도입부

“반악(潘岳)의 ‘이모’(二毛)를 탄식하던 일이 사뭇 어제 같은데, 노령(駑齡)이 어느덧 또 두어 기(紀)를 더하여, 구갑(舊甲)을 다시 만남이 바로 지호(指呼)의 사이에 있다 한다. 옛 사람의 가르친 대로 아직 스스로 ‘늙음을 일컫’지는 않으나, 차차 길어지는 ‘저녁의 풍경’이 눈앞에 다가옴을 앙탈할 길이 없다.

어려서 노인들과 함께 한시(漢詩)를 지을 때, 저들이 걸핏하면 ‘노거’(老去)로 ‘춘래’(春來)와 ‘화개’(花開)를 대(對)하고 ‘백발’(白髮)로 ‘청운’(靑雲)과 ‘황금’(黃金)을 대하기로, 나도 어서 늙으면 대구(對句) 놓기, 시(詩) 짓기가 사뭇 쉬우리라 생각하여 은근히 ‘늙음’과 ‘센머리’를 부러워하였더니, 어이 뜻하였으랴, 어느덧 내가 그러한 손쉬운 대구를 맘놓고 내세울 편의로운 위치에 왔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세월이다. 더구나 50을 지난 뒤의 그것이란, 누구의 말마따나, ‘재[坂]를 내리는 바퀴’보다 더 빠르고녀!”

※반악의 ‘이모’-중국 서진(西晉)의 시인 반악(247~300)이 ‘추흥부’(秋興賦) 서(序)에 “내 나이 서른둘에 비로소 흰 머리카락 두 올을 보았네”고 쓴바, 머리털이 세어지기 시작하는 32세를 뜻한다.

고종석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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