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북공정 탓에 '되찾아야 할 우리 땅 간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우리나라 영토 문제를 가장 체계적ㆍ논리적으로 정리했다는 이한기의 ≪한국의 영토≫(서울대학출판부, 1969)를 찾아 간도 부분을 읽어봤다.
과연 대가의 역작이었다. 간도 영유권 다툼의 출발점인 백두산 정계비 상의 토문(土門)이 두만(豆滿)과 왜 다른지, 구한말 청나라와의 국경협상에서 토문감계사 이중하(李重夏)가 펼친 주장의 정당성 등을 역사적 근거와 영토분쟁 사례 등 해박한 국제법 지식을 토대로 정연하게 정리해놓고 있었다. 간도 문제에 관한 한 이 책을 뛰어넘는 연구성과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는 말에 수긍이 갔다.
●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도 한 가지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토문강을 동쪽 국경으로 삼는다는 '동위토문'(東爲土門) 부분이다. 토문은 송화강 지류이며 두만강과는 다르다는 것은 구한말 이래로 우리의 상식이자 믿음인데,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을 동쪽 국경으로 삼는다면 우리의 국경은 북쪽으로 한없이 열린 모양이 되어서 또 다른 국경 획정이 필요하다.
아니면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토문강→송화강→흑룡강을 거쳐 연해주까지 우리 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보다 넓은 그 광대한 지역에 관리기관 설치는커녕 관헌 한 번 파견한 역사기록이 없는데 당시 조선조정에서 이 지역을 영토로 인식했을 수가 있을까.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던 숙종 당시의 실록에는 어떻게 기록되었을까에 생각이 미쳤다. 인터넷에서 조선왕조실록 사이트(http://sillok.history.go.kr)에 들어가 숙종 부분을 열었다.
백두산 정계 관련 기록을 읽기 시작하면서 내 눈을 의심했다. 청나라 오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의 상대인 접반사 박권(朴權)이 올린 숙종 38년 5월23일 기록이다. "총관이 백산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의 근원이 과연 산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와 이미 경계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고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이 되었으니 분수령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하고, 고개 위에 비를 세우고자 하며…." 목극등이 토문강과 두만강을 같은 강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기록을 읽어내려 갈수록 놀라움은 더 했다. 백두산 정계비 설치가 애초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을 찾아 백두산 일대의 경계를 확실히 하기 위한 것임을 청나라나 조선 조정은 분명히 하고 있었다(숙종실록 38년 2월24일, 4월7일). 청나라는 물론 조선 조정도 여러 곳에서 두만강을 토문강으로 지칭했다(38년 3월6일).
목극등은 정계비를 세운 뒤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을 직접 확인하기까지 했다(38년 6월10일). 숙종 38년 12월 7일 홍치중의 상소를 기록한 실록은 '동위토문'의 진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목극등의 실수였다.
그는 두만강이 천지에서 발원한다고 보고(최근에야 밝혀졌지만 지층구조 상 두만강과 압록강은 천지에서 발원할 수 없다) 송하강으로 흘러가는 지류(이것도 토문강으로 불림)를 두만강의 수원으로 잘못 짚었던 것이다.
● '간도는 우리 땅' 주장은 허구
훗날 정계비에서 지류의 수원까지 돌과 흙더미, 목책 등으로 경계 표시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관원들이 이 물길이 두만강이 아니라 한없이 북쪽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았다. 조선 조정은 홍치중의 상소를 보고 놀라서 어떻게 이를 청에 알려야 할지 의론이 분분했다. 이쯤 되면 간도 영유권 주장은 허구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학계는 그 동안 무엇을 해왔는가. 재야 사학자인 한국땅이름학회 이형석 회장만이 간도는 우리 땅이 아니라는 주장을 해왔지만 학계에서 묵살 당해 왔다고 한다. 이제 우리 역사학계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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