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인 16일 지리산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향하는 등산로는 생채기 투성이었다. 길 곳곳이 움푹 패여 있고, 주변 나무들은 뿌리를 드러낸 채 위태롭게 서 있다. 수 차례 산사태로 산 허리가 뭉툭 잘려나가 시뻘건 흙이 드러나기도 했다. 최근 폭우에 토사가 쓸려 내려간 데다 지난 여름 등산객이 엄청나게 몰려든 결과다.
종주능선은 ‘만신창이’
지리산이 앓고 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의 종주능선(23㎞)은 국립공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만신창이다. 주변 등산로는 집중호우에 휩쓸려 내려가 자갈길이나 다름없고, 일부는 기존 바닥보다 무릎높이 만큼 내려 앉은 곳도 있었다.
노고단 대피소와 정상부 부근은 풀뿌리조차 살 수 없는 민둥산으로 변해버렸다. 노고단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 길에 들어서자 마자 상쾌한 숲 냄새 대신 등산객들의 배설물로 여기저기 악취가 풍겼다. .
중산리~천왕봉 4.8㎞구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지리산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설치한 나무계단은 일부 훼손돼 있었다. 등산로에서 만난 최문식(48ㆍ서울 성북구 장위동)씨는 “2박3일 일정으로 지리산 종주에 나섰는데 곳곳에 튀어나온 돌멩이들 때문에 무릎통증에 시달렸다”며 “등산로가 너무 엉망”이라고 말했다.
산사태 후유증도 심각했다. 수년 전부터 집중호우 등으로 29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했지만 복구되지 않고 있다. 녹색연합과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최근 발생한 산사태를 조사한 결과 천왕봉을 중심으로 한 동부지역인 중봉, 천왕샘 인근에 27건이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천왕봉 오른쪽 능선인 통신골의 한 산사태 지역은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벌겋게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령이 100년이 넘어보이는 주목과 사스레나무, 전나무 등이 돌더미 세례를 받아 뿌리 채 뽑혀 말라 죽어갔다. 관리공단 관계자는 “지리산은 연간 강수량 1,200㎜의 60% 이상이 여름철에 집중되고 산사태가 많이 발생한다”며 “산악 지형인데다 복구를 위해서는 헬기 등 고가의 장비가 투입돼야 하는데 예산(올해 4억원)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지난 여름 등산객만 80여만명
관리공단측은 휴가철인 7, 8월에 지난해보다 30%가량 많은 80여만명의 등산객이 찾았고 이 중 4분의 1이 종주에 나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특히 정상부에는 6월부터 야생화 경관을 감상하려는 사람들이 몰려 피해가 컸다.
대부분 산사태 지역은 30도 이상 급경사여서 인위적인 복구작업이 쉽지 않아 보였다. 복구작업은 천왕봉과 통신골, 중봉의 3곳만 최근 완료했을 뿐 나머지는 방치돼 있다. 관리공단측이 복구공사를 마쳤다고 밝힌 중봉 산사태지역의 경우 벌써 인조 부직포에서 흙더미가 비집고 나와 2차 피해마저 우려되고 있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만든 도로도 환경훼손을 부추기고 있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뱀사골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강춘식(56)씨는 “성삼재 도로는 하루 수백대의 차량이 운행하는 탓에 머리가 아프고 가을철 단풍잎을 만지면 시커먼 매연이 묻어날 정도”라고 말했다.
산행 사전예약제 등 대책 시급
전문가들은 휴식년제 실시지역을 확대하고 1일 최대 수용인원을 산정해 미리 예약한 등산객만 입산을 허가하는 산행 사전예약제 도입 등 특단의 대책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 반야봉 정상부의 경우 10여년 전부터 등산객들의 출입을 통제한 이후 각종 초목류들이 되살아나는 등 생태계가 복원되고 있다.
관리공단측은 1990년대 초부터 휴식년제를 도입했지만, 등산로 주변은 이용객들의 반발에 부딪쳐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 관리공단 관계자는 “휴식년제 확대 등이 무산돼 자연복구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환경부 환경전문위원인 성신여대 강해순(50ㆍ여ㆍ생물학과) 교수는 “지리산의 총체적인 관리와 복원을 위해 상태에 따라 철저한 관리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 녹색연합 제공
창원=이동렬기자 dylee@hk.co.kr 산청=정창효기자 ch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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