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이 ‘파업 터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다시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13일 실시된 포항지역 건설노조가 파업지속과 노사 잠정합의안 수용 여부를 놓고 벌인 투표결과, 합의안을 거부하고 파업을 지속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포항 시민들은 “여름 휴가 대목을 포함해 80일 가까운 파업으로 지역 경제가 거덜이 난 마당에 파업을 계속한다는 건 너무한 처사”며 노조를 맹비난하며 집단 행동이라도 벌일 태세이다. 사측인 포항전문건설협회와 소속 업체들은 줄 도산이 불가피하다며 아예 체념한 상태이며, 작업장에 복귀한 노조원들도 향후 불어 닥칠 무더기 실업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 시민들“해도 너무한다”비난
파업 중단을 학수고대하던 시민들은 예상과 달리 부결소식이 전해지자 자포자기한 모습이다. 죽도시장 상인 박모(56)씨는 “피서철에 포스코본사를 점거하고 불법폭력 시위를 벌여 장사를 망치더니 이제 민노총과 건설노조가 포항을 말아 먹으려고 작정한 것 같다”며 노조를 비난했다. 이모(41ㆍ여ㆍ포항시 환호동)씨는 “공멸위기감이 퍼지면서 타결되는 것으로 믿었는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 달 초부터 조업현장에 복귀했던 일부 노조원들도 허탈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노조원은 “당장 쌀 살 돈도 없어 배신자 소리까지 들으며 출근하다가 이제 당당하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노조원들도 두달반 동안 일을 못해 1인당 500만∼600만원의 임금손실로 실업급여에 의존해 생계를 꾸리고 있다.
또한 포항전문건설협회 소속 업주들도 ‘무더기 공사포기와 부도사태가 이어질 것’이라며 시름에 빠졌다. 한 관계자는 “수입이 한푼도 없었지만 사채까지 끌어다 쓰며 한 달에 1억∼2억원의 관리비를 부담하며 버텼는데 한계에 다다랐다”며 “당장 포스코건설에 공사포기 각서를 제출하고 사업을 접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 일부 강경파가 부결 주도
포항건설노조는 당초 예정보다 2시간 늦은 이날 오후 4시께 잠정합의안에 대한 찬반투표를 실시했으나 투표자 2,056명의 64.5%인 1,325명이 합의안 수용에 반대했다. 찬성은 714표, 무효는 17표로 나타났다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노조원 투표로 파업 사태가 일단락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한국노총 산하의 새로운 노조 건설 움직임에 위기의식을 느낀 집행부와 강경파들이 적극적인 반대운동이 나서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강경파들은 투표시작 시각을 미루면서 “뭉쳐야 산다. 한번 더 기회를 달라. 포스코가 발주사를 다변화하는데 이대로 수용하면 일자리가 없어진다”며 반대 분위기를 조성했다. 집행부는 ▦구속자 석방(62명) ▦포스코의 손해배상소송 철회(16억3,000만원) 등을 요구하고 있다.
■ 줄 도산ㆍ무더기 실업사태 우려
포스코는 이번 파업으로 내년 3월 완공 예정인 파이넥스 설비에서만 32억원 등 하루 평균 50억원이 넘는 기회비용손실이 누적되고 있다. 또한 내년 3월로 일단 연기했던 파이넥스 설비 준공 일정을 기약할 수 없게 돼 대외 신뢰도 추락이 불가피해졌다.
D실업 등 3개사는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공사를 포기했고 찬반투표 가능성에 따라 각서제출을 미루던 14개사도 이번 주 내로 공사를 포기할 태세다. 또 파업이 이 달을 넘길 경우 나머지 전문건설업체의 상당수도 고정ㆍ관리비용을 부담하기 어렵게 되고 공사를 포기한다면 상근직원들은 물론 파업 노조원들까지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얻기 어려워 무더기 실업사태가 예상된다.
이미 작업장에 복귀한 노조원들이 500여명이 넘는데다 민노총의 강경방침에 반발한 일부 노조원들이 한노총 산하의 새로운 노조건설을 추진하고 있어 노노갈등이 악화하고, 일반 시민들과 노조원 가족들간 갈등도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외견상 “얻은 것이 없다”며 이날 잠정합의안을 부결시킨 노조는 사측과 협상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사측에서 특별히 추가로 양보할 형편이 안돼 조기 타결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포항=이정훈기자 jhlee01@hk.co.kr정광진기자 kjche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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