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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29> 게리 헤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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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29> 게리 헤밍

입력
2006.09.13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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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8월 13일, 알프스의 프티 드뤼 서벽에서는 두 명의 독일인 등반가가 조난상태에 빠져 있었다. 즉각 구조대가 급파됐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상대적으로 수월한 노멀 루트로 정상에 오른 후 조난지점으로 하강하려 했던 제1구조대는 강풍과 폭풍설에 발이 묶여 버렸고, 서벽을 가로질러 북서릉으로 접근하려던 제2구조대 역시 피톤조차 박아 넣을 수 없을만큼 꽝꽝 얼어버린 바위벽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사이에 무정한 시간들은 한 없이 흘러가 며칠이 지났다. 두 명의 조난자에게 죽음은 피해갈 수 없는 길인 것 같았다. 때마침 이탈리아 방면에서 몽블랑에 오르기 위해 근처에서 등반을 준비 중이던 게리 헤밍(1933-1969)에게 그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프티 드뤼 서벽에 누구보다 정통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게리 헤밍이다. 그는 일찍이 1962년, 요세미티의 ‘철학자’ 로열 로빈스와 함께 그 벽에 달라붙어 ‘아메리칸 다이렉트’라는 루트를 개척해낸 산악인이다. 자신의 등반을 포기하고 구조활동에 나서려는 그를 동료가 만류하자 게리는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 벽은 내가 알아. 이곳의 가이드들은 절대 구조할 수 없어. 나마저 외면하면 그들은 죽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해?” 샤모니로 달려온 그는 정예대원 8명을 선발해 2개조로 나눈 다음 ‘알프스 등반사상 가장 가능성 없는 구조활동’을 총지휘한다. 4명은 루트를 뚫고 4명은 식량과 장비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루트를 뚫고 올라가는 구조대의 선두는 당연히 게리가 맡았다.

그것은 끔찍한 사투였다. 일찍이 그 벽에 직등 루트를 뚫었던 게리조차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해 손발이 얼어갔고 기력은 쇠진해갔다. 조난자와 구조자들이 내지르는 절망과 고통의 울부짖음이 알프스 전역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들의 비극적인 조난 상황과 헌신적인 구조 활동은 당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신문에 연일 대서특필됐다.

이를테면 실시간 생중계되는 ‘핫 이슈’가 돼버린 것이다. 마침내 게리는, 조난 상황 발생 후 일주일 만에, 거의 가사상태에 빠져 있는 그들과 조우하는데 성공했다. 게리는 쉬어버린 목소리로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아직 죽지 않았어. 내가 그들을 데리고 내려 갈게!”

당시 게리가 펼쳐보인 영웅적인 구조등반은 이후 ‘샤모니의 전설’이 됐다. 무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샤모니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초인적인 등반으로 다 죽어가던 사람들을 구조해낸 이 ‘알프스의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가 ‘이방인’으로 취급당한 것은 단지 미국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구조 직후 그를 둘러싸고 들이닥친 전세계의 매스컴 앞에서 게리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내 이름은 게리 헤밍, 미국에서 왔소.” 그뿐이었다. 나이를 물어도 묵묵부답, 등반경력을 물어도 묵묵부답. 게리는 피곤한 얼굴로 기자들을 헤치며 자리를 떨치고 있어섰다. “피곤해. 길 좀 터줘. 가서 쉬어야겠어.”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몹시도 싫어했던 게리는 남겨진 사진조차 몇 장 되지 않는다. 모든 사진들 속의 그는 언제나 같은 모습이다. 더부룩하게 자란 긴 머리카락, 우울하고 퀭한 눈빛의 두 눈, 낡고 해진 붉은 색 점퍼, 빛 바래고 찢어진 청바지, 그리고 데카당스한 스카프. 알프스 사람들은 그를 ‘숨겨진 영웅’이라 칭송하면서도 뒷전에서는 ‘양키 출신의 정신 나간 히피’라고 수근거렸다. 실제로 그는 사람들이 ‘히피’라고 부를 때 흔히들 연상하는 그 모든 악덕들을 온몸으로 구현한 사내였다. 난잡한 성관계와 마약 과다복용, 그리고 반전사상과 사회적 부적응. 게리는 이에 덧붙여 평생 헤어나지 못했던 치명적인 결함을 한 두 개쯤 더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정신착란과 우울증이다.

게리 헤밍의 삶을 되짚어 보노라면 명치 끝이 아파온다. 그의 아버지는 흉악한 범죄자였다. 일찍이 남편과 이혼한 그의 어머니는 게리로부터 아버지의 기억을 지워버리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어린 소년의 상처는 쉽사리 봉합되지 않았다. 세상에 정 붙일 곳을 찾을 수 없었던 청년 게리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다름 아닌 바위였다.

20대의 게리는 조수아트리와 타퀴즈 암장에서 놀랄만한 기량을 연마한 후 요세미티 하프돔 북서벽에 새 길을 연다. 한때 공군사관학교에 재학한 적도 있고, 그곳에서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기르며 만족스러워 하기도 했지만, 체제전복적이고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상 오래 머무를 곳은 못됐다고 한다. 1960년이 되자 그는 “미국적 삶의 방식에 넌덜머리가 나서” 알프스로 날아간다.

그가 1960년대에 알프스에서 펼친 등반은 당대 최고의 것이었다. 이들 중 로열 로빈스와 함께 한 프티 드뤼 서벽 아메리칸 다이렉트 초등기록 및 존 할린과 함께 한 에귀 뒤 푸 남벽 초등 기록은 세계 등반사에 굵은 글씨로 아로새겨진 기념비적 등반이다.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등반경력도, 외국 매스컴의 비아냥 어린 찬사도,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진 본원적 상처와 슬픔을 어루만져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언제나 작가가 되고 싶어했던 그가 유독 죽음이나 자살에 대한 글들을 많이 쓰게 된 것은 이때쯤이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다만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1960년대 후반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가 마주친 것은 환멸뿐이다. 한때 영혼의 교류를 나누었던 히피 시절의 친구들은 이제 모두 다 자신들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기성세대’가 돼버린 이후였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막노동도 하고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기도 했지만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울증은 더 심해지고 정신착란 역시 자주 일으켰다. 어찌보면 그는 처음부터 이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게리 헤밍은 기어이 자살로 자신의 짧은 삶을 마감한다. 향년 36세. 그가 자살 직전 남긴 메모가 인상적이다. “빨리 미국을 떠나야만 돼. 이 나라에서는 언제나 죽음이 나를 덮치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 "흔적 남기지 마라" 독특한 등반 철학… 삶의 흔적 남기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평소에는 거의 말이 없고, 이따금씩 입을 열면 남들은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내용을 읊조릴 뿐이었지만, 게리 헤밍에게도 마음을 터놓을만한 상대가 몇 명 있었다. 그는 언제나 월터 보나티와 로열 로빈스를 존경한다고 말해왔다. 월터 보나티의 고독한 용기와 모험정신, 그리고 로열 로빈스의 겸손한 삶의 태도와 사려 깊은 등반철학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노라고 고백해왔던 것이다.

아메리칸 다이렉트 초등 직후 게리는 이렇게 말했다. “어디를 올랐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어떻게 올랐느냐가 중요하지. 인공등반장비는 최후의 선택일 뿐이야. 자신의 힘만으로 올라야 돼. 나는 이렇게 우아한 태도를 로열 로빈스에게서 배웠지.” 자폐적인 은둔자 스타일의 게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만의 등반철학을 만들어낸다. “네가 오른 길에 아무 것도 남기지 말아. 너는 그냥 그곳을 스쳐지나간 사람일 뿐이야. 네 뒤에 오르는 사람도 마치 그곳을 초등하듯 오를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만 해.”

게리는 자신의 등반기록 자체에 연연하지 않았다. 매스컴과의 인터뷰 따위에 넌덜머리를 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오를 때 설치한 피톤과 슬링들마저 모두 제거해버려야만 직성이 풀렸다. 알프스에는 그가 오른 무명의 험봉들이 즐비한데, 게리는 그것들 대부분을 단독등반으로 올랐고, 등반 이후 루트 개념도 따위를 남기지도 않았다. 흔적을 남기지 말 것, 게리가 거의 강박관념에 가깝도록 집착한 등반철학이다. 어쩌면 그는 삶의 흔적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산악문학작가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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