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28> 광고카피-탈근대의 문학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28> 광고카피-탈근대의 문학

입력
2006.09.12 23:53
0 0

흔히 광고를 자본주의의 꽃이라 이른다. 상품과 서비스의(그리고 때론 정치이념이나 신앙 같은 무형 가치들의) 자본주의적 유통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몫이 그만큼 크다는 뜻일 테다. 광고가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것은 광고카피가 가장 자본주의적인 언어라는 뜻이기도 하다. 광고카피는 거룩한 시장 위에서 나풀거리는 매력의 언어다. 그 매력은 대체로 화사함에서 오지만, 광고카피가 늘 화사한 것은 아니다.

광고카피에서 화사함은 절대가치가 아니다. 절대가치는 구매충동의 부추김이다. 탈근대 사회의 데카르트적 잠언 둘은 “나는 산다(購買), 고로 나는 산다(存在)”와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기 때문이다. 구매충동과 소비욕구를 부추기기 위해, 광고카피는 가장 소박한 언어가 될 수도 있다.

구매충동이 이는 것을 요즘 젊은 세대는 흔히 “지름신이 오셨다”고 표현한다. 광고카피는 바로 그 지름신을 불러내는 주문이다. 그 주문에는 현대 행동심리학의 고갱이가 들어 있다. 그것은 소비사회가 찬양하는 욕망의 집중적 표현이다. 이 유혹의 언어들은 대체로 과장됐고 때로 유치하지만, 바로 그 과장과 유치함이 ‘구매 인간’ ‘소비 인간’의 평균 감각인 것도 엄연하다.

자동차는 현대인이 꽤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적 공간이다. 그 움직이는 공간을 팔기 위해 상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햇빛 아래 눈부신 차는 많습니다. 그렇지만, 빗길에서도 눈부신 차는 흔치 않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시대를 앞서 왔습니다”, “길이여, 세상이여, 숨을 죽여라!”, “서른두 살, 당신을 흥분시키러 왔다”, “품격으로 세상을 리드하는 당신이 그랜저입니다”, “당신의 깊이, 그것은 렉서스의 힘”, “숨이 멎는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물론 이 말들은 다 ‘지나친 말’이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이 지나친 말을 원하고, 이 지나친 말이 제게 건네지는 것에 우쭐해 한다.

광고카피들은 소비자들에게 이러이러한 상품을 사서 씀으로써 당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당신의 품격을 뽐내라고 들쑤신다. 대중소비사회에서 한 사람의 값어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티내며’ 소비하는 것의 교환가치이기 때문이다. 그 ‘티내기’의 수단은 자동차이기도 하고, 집이기도 하고(“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당신에게서 인생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방배동 센트레빌에는 누가 살길래… 우리 집에서 본 한강이 아름답습니다.

한강에서 본 우리 집이 아름답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됩니다”,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신용카드이기도 하고(“진정한 성공의 의미를 아는 당신--당신의 행복에 삼성카드가 함께 합니다”, “나의 데스크는 작지만 나의 세계는 넓다”), 가전제품이기도 하고(“이 기준을 넘지 못하면 무선노트북이 아닙니다”, “걸러내기만 하는 정수기라면 당신을 기다리게 하지 않았습니다”,“저 요즘 대우받고 살아요”), 입성이기도 하고(“그의 이야기를 입는다”), 술이기도 하고(“당신의 걸음은 세상의 길이 됩니다”), 젊은 피부이기도 하다(“당신의 가치는 피부가 말해줍니다”).

젊은 피부! 그렇다. 당신의 ‘젊고 아름다운’ 몸이 당신의 가치를 결정한다. 그것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화장품 광고카피에서다. “감출수록 드러나는 그녀”, “나이의 흔적을 지워줍니다”, “어느 순간 여자들 사이에서 촉촉함이 차이 나기 시작했다”, “시간조차 숨죽이는 아름다움”, “시간이 멈춘 피부” “50cm쯤 그녀의 얼굴이 다가왔을 때 차이가 느껴졌다” 같은 카피는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현대인의 집착에 슬기롭게 호소한다. 몸 이미지는 흔히 섹스 이미지로 전환한다.

그리고 그것은 화장품 광고카피에 멈추지 않는다. “나만 마신다고 약속해요”나 “탱글탱글, 연한 알갱이가 톡톡!” 같은 식품 광고카피나 “여자만이 느끼는 열정” 같은 가전제품 광고카피, “집이 여자를 닮았다” 같은 아파트 광고카피에서도 섹스의 은유는 슬그머니 또는 까놓고 펄럭인다.

광고카피는 최신 문학이다. 거기서는 대구(對句), 비교, 대조, 중의(中意), 은유, 인유, 의인, 역설, 반어, 반복, 생략 등 온갖 수사학이 나부끼고, 형태주의 시학자들의 눈길을 끌만한 운율론 기술들이 범벅된다. 광고카피는 또 굳이 규범언어에 얽매이지 않는다. “당신을 감탄합니다!”(자동차)나 “소녀, 입술하다”(화장품) 같은 광고카피 앞에서 문법학자들은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카피라이터들이 문법에 어두워서 이런 카피를 만든 것은 아닐 테다.

그들은 문법을 살짝 구부림으로써, 소비자들의 감각을 자극할 강렬함을 제 언어에 부여하고 싶어했을 게다. 그리고 그들은 흔히 성공한다. 그 점에서도 카피라이터들은 현대의 시인들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시적 허용’을 ‘광고적 허용’으로 대치하고 있다.

광고의 역사를 기원 전 이집트의 로제타석으로까지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지만, 근대적 의미의 광고는 17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게 통례다. 한국 최초의 광고카피로는 한성주보 1886년 2월22일자(제4호)에 실린 세창양행(世昌洋行)의 광고(상자기사)를 흔히 꼽는다. 세창양행(Edward Meyer & Co.)은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독일 무역회사로, 그 시절 홍콩에 아시아본점을 두고 인천을 포함해 아시아 몇몇 도시에 지점을 두었다.

마정미의 ‘광고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2004, 개마고원)에 인용된 초창기 광고카피를 살피다보면, 지난 한 세기 동안 변한 것은 한국어의 스타일만이 아니라 소비자들과 상인들의 감수성이기도 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예컨대 독립신문에 실린 말라리아 치료제 금계랍(염산키니네) 광고카피는 이렇게 소박하다. “세창양행 제물포. 세계에(서) 제일 좋은 금계랍을 이 회사에서 또 새로 많이 가져와서 파니 누구든지 금계랍 장사 하고 싶은 이는 이 회사에 와서 사거드면 도매금으로 싸게 주리라.”

‘광고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 서문에서 저자는 “우리는 광고를 통해 사회사의 흔적을 추적하게 될지 모른다. 유행과 열광의 일어남과 스러짐을, 음식과 의복 분야의 관심과 기호 변화를, 오락과 악습을, 또 당대 삶의 파노라마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될지 모른다”는 광고인 캘킨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좀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해도 좋았을, 올바른 진단이었다. 광고카피는, 바로 그 맥락을 따라 더 나아가, 사회사만이 아니라 심성사의 사료가 될 법도 하다. 인간의 욕망 회로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가장 생생히 보여주는 것이 광고카피이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한 세기는 인간의 심성이 달라지기엔 너무 짧은 기간 같기도 하다. 20세기 전반기 광고카피들이, 비록 요즘 카피들보다 문장이 소박하고 정보전달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긴 하나, 당대 주류 가치에 대한 허영심을 부추긴다는 점에선 지금의 광고들과 본질적 차이가 없어 보여 하는 말이다. 1926년 동아일보에 실린 한 비누 광고카피의 헤드라인은 “흑인이 변하야 미인이 된다”였다.

해방 뒤에야 모습을 드러낸 정치광고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다. 물론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측이 내세운 “유권자 여러분! 이순신을 택할 것인가 원균을 택할 것인가, 놀부를 택할 것인가 흥부를 택할 것인가”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측이 내세운 “노무현의 눈물 한 방울이 대한민국을 바꿉니다”는 그 세련의 정도에서 인상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차이는 그 동안 정치 광고카피가 겪은 진화의 정도를 드러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대화하기보다 감성을 뒤흔들어대려 한다는 광고의 본질적 속성에서, 노무현의 정치광고는 박정희의 정치광고와 다를 바 없다.

넓은 의미의 정치광고, 곧 의견광고의 역사에서 누락시킬 수 없는 것이 1975년 첫 사분기에 동아일보 지면을 메웠던 격려광고일 테다. 당시 박정희 유신체제에 비판적 논조를 보였던 동아일보에선 1974년 12월 중순부터 광고가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여기 정권의 손이 작용했다고 판단한 이 신문 독자들이 이듬해 신년호부터 유료 격려광고를 내 자유언론 운동을 지지하는 유례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라는 익명으로 나간 첫 격려광고를 낸 이가 당시의 ‘재야인사’ 김대중씨였음이 올해 들어서야 밝혀졌거니와, 이 광고 이후 동아일보에는 “이렇게 국민을 우롱할 수가!”, “배운 대로 실행 못해 부끄럽다”, “나도 이 작은 마음을” “동아여 암흑에 한 줄기 빛을” “동아 탄압 발상(發想)한 자여! 세세손손이 잘 먹고 잘 살아라” 같은 카피의 광고들이 익명이나 반(反)익명 또는 단체의 이름으로 쉼 없이 실렸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는 시민들의 격려 대상이었던 비판적 기자들을 그 해 3월 무더기로 쫓아냄으로써 정권에 무릎을 꿇었고, 이내 동아일보 광고 난은 ‘정상화’됐다.

한국 최초의 광고가 한성주보에 실렸다는 사실에서도 암시되듯, 광고의 역사는 매스미디어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 광고는 신문과 잡지, 라디오와 텔레비전, 인터넷 덕분에 대중을 만날 수 있었고, 이런 대중매체들은 광고 덕분에 수지를 맞출 수 있었다.

오늘날 광고는 좁은 의미의 대중매체만이 아니라, 버스, 택시,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수단이나 대형건조물들까지 거처로 삼고 있다. ‘광고의 홍수’라는 말은 그래서 상투적인 만큼이나 옳은 표현이다. 그 표현은 우리가 압도적으로 감성의 언어에 둘러싸여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덕상(德商: 독일회사) 세창양행 고백(告白: 광고)

“알릴 것은 이번 저희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호랑이 수달피 검은담비 흰담비 소 말 여우 개 등 각종 가죽과 사람의 머리카락, 소 말 돼지의 갈기털, 꼬리, 뿔, 발톱, 조개와 소라, 담배, 종이, 오배자, 옛 동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손님과 상점 주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물건들은 그 수량이 많고 적음을 막론 모두 사들이고 있으니 이러한 물건을 가지고 저희 세창양행에 와서 공평하게 교역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기록하여 알립니다. (...) 알릴 것은 이번 저희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외국에서 자명종시계, 들여다보는 풍경(peep show), 뮤직박스, 호박, 유리, 각종 램프, 서양단추, 각색 서양직물, 서양 천을 비롯해 염색한 옷과 선명한 염료, 서양바늘, 서양실, 성냥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수입하여 물품의 구색을 맞추어 공정한 가격으로 팔고 있으니 모든 손님과 상인은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소매상이든 도매상이든 시세에 따라 교역할 것입니다. 아이나 노인이 온다 해도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희 세창양행의 상표를 확인하시면 거의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번역문 ‘한성주보’, 1886년 2월22일)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