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에 국악에 입문해 ‘남원의 소녀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던 안숙선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소녀 가장이 됐다. 안숙선이 벌어온 돈은 어머니의 손을 통해 장롱 속으로 들어간 뒤 웬만해서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안숙선에게 그 장롱은 온 가족의 보물창고처럼 느껴졌고, 어머니 몰래 우렁 각시가 들어있지는 않나 뒤져보기도 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안숙선은 그 낡은 장롱을 들여다보며 힘들었던 시절을 돌이킨다.
한국무용가 이애주의 애장품은 스승 한영숙으로부터 물려받은 승무 장삼과 고깔. 이애주는 전통 춤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한 스승의 혼이 그 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살풀이 명인 정재만은 아들이 17년 전 프랑스 벼룩시장에서 사다 준 중절모를 특별히 아낀다. 프랑스의 멋이 담겨 있어 그런지 그의 예술세계와 맞닿아 있는 듯 느껴진다고 한다. ‘허튼 소리춤’ 등의 공연에서는 중절모를 쓰고 춤을 추기도 했다.
19일부터 열리는 제26회 대한민국 국악제를 앞두고 한국국악협회가 펴낸 책 ‘명인에게 길을 묻다Ⅱ’는 이처럼 국악 명인들의 삶과 예술을 그들의 애장품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오랫동안 뚜렷한 색깔 없이 이어져 오던 대한민국 국악제는 지난해부터 10명씩의 명인을 선정, 공연과 책을 통해 이들의 예술세계를 집중 조명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올해의 10대 명인은 가야금 병창의 안숙선과 강정숙, 남창가곡의 이동규, 대금정악의 박용호, 선소리산타령의 황용주, 경기민요의 이춘희, 판소리의 남해성과 김일구, 승무의 이애주, 살풀이의 정재만 등이다.
이들을 재조명하기 위해 명인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평론가와 교수, 작가 10명이 참여해 한 권의 책을 묶어냈다. ‘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만나보는 명인들’이라는 컨셉트의 사진 속에서 명인들은 루이비통 매장, 서울역, 테헤란로, 코엑스 등 서울 도심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책이 명인들을 간접적으로 만나는 기회라면, 19일과 20일 오후 7시30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리는 ‘명인에게 길을 묻다’공연은 이들의 기예를 직접 접할 수 있는 자리다. 첫날은 박용호 안숙선 이애주 남해성 황용주 명인이, 둘쨋날에는 이동규 김춘희 김일구 정재만 강정숙 명인이 무대에 선다. 23일과 24일에는 진도에서, 25일과 26일에는 제주에서 그 지방의 민속음악과 춤을 중심으로 하는 공연이 이어진다. (02) 744-8051
김지원기자 eddi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