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낯선 러시아 연해주의 한 폐교에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덮인 벽과 창틀을 사포로 문지르고 새 페인트로 칠하고 있었다. 서툴지만 정성어린 노동은 연해주 고려인을 위한 선물이었다. 고려인 문화회관을 새로 고쳐 주는 일이었다.청소년들은“땀방울이 흐르고 먼지가 날릴수록 몸은 개운해지고 가슴은 꽉차간다”고 자랑스러워했다. 흉물스럽던 문화회관의 벽에 전사가 말 달리고, 무희가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고구려 고분 벽화와 우리 전통 혼례 모습이 그려지더니 이윽고 새 건물로 확 바뀌었다.
국가청소년위원회 산하 한국청소년진흥센터가 꾸린‘대한민국 청소년자원봉사단’ 174명이 4일부터 10일동안 연해주의 파르티잔스크에 둥지를 틀었다. 센터가 러시아에 100명이 넘는 대규모 봉사단을 파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현지 문화회관 리모델링, 고려인농장 일손 돕기, 한국체험관 설치등의 봉사활동을 통해 고려인과 만났다. 고려인한사람한사람의 눈물 젖은 증언은 조국의소중함을 깨닫게해주는 계기가 됐다.시작은 불편하고 두려웠다. 가는 여정(전국 16개 시·도→서울→속초항→러시아 자루비노항→파르티잔스크)만 이틀이 걸렸다.먹고 자는 일이 녹록지 않은 것은 물론, 벽지 장판 안료 같은 건축용 자재를 구하기도힘들었다. 해본 적 없는 노동이라 허리와 어깨가 쑤시고, 다리가 저리며, 가슴이 턱턱 막혔다.
하지만 가슴과 가슴이 노둣돌을 놓으면서시나브로 봉사단과 고려인은 하나가 돼갔다.고려인 남제냐(54)씨는“러시아 땅이든 한반도 땅이든 피는 한가지요”라며 고국의 방문객을 보살펴 줬다. 봉사단 이선애(14·강진대구중3)양은“민족의 아픔을 안고 사는 고려인을 보니 지금 노동 속에 겪는 작은 불편은 그저 호사일 뿐”이라며 일하는 작은 손에더욱 힘을 주었다.
덕분에 고려인 5,000여명이 살고 있는파르티잔스크엔 모처럼 신바람이 불었다.먹고 살기 팍팍한 고려인은 난생 처음 꼬깃꼬깃 쌈짓돈을 모아 문화회관 등 건설자금으로 보태고, 편한 생활에 익숙했던 청소년은 끼니도 잊은 채 밤늦도록 일에 매달렸다.
봉사단은 틈나는 대로 고려인돕기운동본부 김재영 연해주 본부장을 통해 고려인의 역사를배웠다. 산 좋고 물 맑아‘수청(水淸)’이라 불리는 파르티잔스크는 사실‘빨치산의 마을’이라는뜻이다. 1860년부터 가난과 수탈을 피해 연해주로 건너간 조상들은 고향산천을 빼닮은 이곳에‘작은 한국’을 세웠다. 일제강점기엔 안중근 의사, 홍범도 장군 등 독립 투사의 거점이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동네 사람들은 중앙아시아로 끌려가야 했다.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리고 90년대에는 옛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면서 우즈베키스탄 등 신생국가가 출현, 쫓기다시피 연해주로 돌아와야 했다. 생활은 비참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고 있다.참혹한 역사 때문에 청·장년층인 고려인 3세대 이후는 우리말을 못한다. 그러나 그리움은 매한가지다. 리디니스(21)씨는 봉사단원 한 명에게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적어 달라고부탁한뒤읽고또읽었다. 봉사단은“고려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눈물이 났지만 광활한 연해주 땅을 옥토로 만든 이들이 자랑스럽기도 했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봉사단은 10일엔 230년동안 연해주를 호령했던 발해의 옛 성터를 답사했다. 이날 밤엔 파르티잔스크 시립극장에서 태권무 사물놀이 꼭짓점댄스 공연을 펼쳤다. 봉사단 서성갑(한국청소년진흥센터 소장)장은“고려인의 역사를 바로 알게 되고, 현지 러시아인에게 한국도 알려 무척 보람이큰 활동이었다”고 평가했다.
황희영(21·전주대3)양은 일기에 이렇게적었다. “봉사라는 작은 보따리를 풀어놓자 감사만이 가득하다.” 봉사단은 14일 속초항을통해 귀국한다.
파르티잔스크(러시아)=글·사진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