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기억과 진실마저 편집해버리는…'
소설가 하성란(39)씨가 네번째 소설집 ‘웨하스’(문학동네, 9,500원)를 출간했다. 2004년 이수문학상을 수상한 ‘강의 백일몽’을 비롯해 2002년 이후 발표한 11편의 단편을 모은 책이다. 단어 하나를 허투루 들여놓지 않는 밀도 높은 문장과 쓸쓸하면서도 애정어린 시선으로 뒤를 돌아다보는 아득한 허무주의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듯 고스란하다.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 이후 4년 만에 펴낸 이번 소설집에서도 작가는 예의 그 극사실적 묘사와 정치한 반전을 통해 시간의 폭력이 가한 일상의 환부를 응시하는 작업을 계속한다. 동세대 작가들에게서 흔히 보게 되는 나르시시즘의 자기 체험담을 배제하는 그의 소설들에서 독자는 마침내 ‘삶이란 게 당신 생각처럼 그렇게 견고한 것은 아니다’고 말하는 그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될 것이다.
이번 소설집은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광포한 폭력인 시간에 대한 사유로 촘촘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선 내면의 탐험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소설집에서 작가는 과거의 문제적 시간과 직면한 여러 인물들을 조립해낸다. 표제작 ‘웨하스로 만든 집’에선 결혼 10년 만에 이혼해 변두리 소도시의 옛집으로 귀국해 돌아온 여자가 무너진 집더미에 깔린 채, 새 집에 이사 온 첫 날 자매들과 이층 마루를 뛰어다니며 깔깔거리던 아스라한 행복의 시간을 떠올린다.
유리 겔라의 숟가락 구부리기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1984년 실업계 고교를 졸업한 어떤 여자는 기적처럼 순조로웠던 삶의 한 때를 떠올리며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 해의 시간 속으로 빨려들어가고(‘1984년’), 20년 전 개에게 팔뚝을 물어뜯긴 기억으로 소매치기 남자의 팔뚝을 물어뜯은 또 다른 여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쓰라린 균열을 체험한다(‘강의 백일몽’).
그러나 모든 것을 변전하고 사멸케 하는 시간의 변박자는 기억과 진실마저 편집한다. 튼실한 목조가옥이 웨하스로 만든 집처럼 무너져 내리듯(‘웨하스로 만든 집’), Y라고 믿고 있었던 사진 속 눈길이 실은 Y의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20년 후의 돌연한 의구심으로 출몰하듯(‘강의 백일몽’), 시간은 인간들이 믿고 있는 진실이란 게 얼마나 허약한지를 폭로하며 고독의 지점으로 인물들을 밀어낸다.
유리 겔라가 숟가락을 구부렸던 ‘기적’은 끝내 사기로 밝혀졌지만, 그 염력자처럼 자신도 숟가락을 구부렸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에겐 그 해가 삶을 견디게 하는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다. “열아홉 살, 내 책가방에는 늘 구직용 이력서 다섯 통이 비치되어 있었”던 실업계 여고생이 졸업 3년 만에 갖게 된 면접자리에서 숟가락 염력의 기적으로 취직에 성공할 때(‘1984년’), 거짓희망은 참희망보다 얼마나 간절하고 가슴 아린가.
한 줄의 줄거리로 요약되지 않는 ‘웨하스’ 속 소설들을 읽으며 독자들은 바쁠 것이다. 한 문단 안에서 여러 시점이 종횡무진하고, 과거와 현재는 같은 문단 안에서 숨가쁘게 교차 편집된다.
의도적으로 문단 구분을 하지 않거나 등장인물의 실체나 사건의 진위를 끝내 밝히지 않는 작가의 ‘모호함의 전략’으로 인해 독자는 여러 번 같은 문장을 되읽으며 소설의 얼개를 재구성해야 한다. 그것이 단지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을 그대로 그려내는 카메라의 렌즈가 되지는 않겠다는 작가의 결연한 의지라는 것을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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