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자살자도 대개 남은 가족이나 친지들의 구구한 추측만이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를 간접적으로 전해줄 뿐이다. 유서를 남긴 경우에도 먼저 가는 미안함, 사회에 대한 막연한 원망이 대부분일 뿐 자살이란 막다른 길에 몰리게 된 사연은 대개 가슴 속에 깊이 싸 안고 간다. 그들은 왜 자살을 택했을까.
서울시 광역정신보건센터에 2005년 1월부터 올 7월까지 자살 상담을 한 937명을 통해 자살을 마음 먹게 된 주변 상황, 심리 상태 등을 살펴봤다. 이들 중 57%는 과거에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었고 이 중 3번 이상 시도한 사람도 30%나 됐다. 안타깝게도 자살한 사람도 4명이나 됐다. 나머지는 자살을 고민하고 있는 경우다.
●가정이 자살의 진앙
자살 충동을 불러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은 가족문제였다. 피상담자의 28.5%가 가족문제로 자살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10대를 제외한 전 연령층에서 가족은 상담자를 절망의 나락으로 이끄는 제일 큰 고민거리였다. 가족문제 중에서는 재산문제와 성격 차이 등으로 인한 가족 구성원간 갈등(75%)이 가장 심각했다. 가족 내 소외감, 배우자 외도, 가정폭력, 가출 등으로 충격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기러기 아빠들이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상담을 의뢰하기도 했다. 전준희 위기관리팀장은 “가족 간 대화 부족, 이혼 등 가족해체가 가속화하면서 사소한 문제에도 구성원들이 큰 충격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젊은 층은 비관ㆍ대인관계
가족문제 다음으로 자살을 유발하는 요인은 비관(16.1%) 대인관계(14.7%)였는데 주로 20, 30대 등 젊은 층이 이런 이유로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비관은 단순한 삶에 대한 비관부터 장애와 질병, 사회적 무관심에 대한 비관까지 다양했다. 성형수술이 잘못돼 자살을 생각한 사람도 6명이나 됐으며 군대 생활 중 구타와 언어폭행, 부적응 등으로 자살을 고민한 경우도 있었다. 대인관계 중에서는 이성문제로 자살을 생각한 경우가 가장 많았지만 친구나 직장동료와의 갈등 및 부적응, ‘왕따’ 등으로 고통 속에 있는 피상담자도 상당수였다. 또 취업 및 성적 문제(13.6%)도 자살 위기를 초래하는 주요한 동기였다. 전 팀장은 “10대와 20대 초반은 진학과 취업, 20대는 사회생활 부적응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40대 이상 남성은 생활고
생활고 카드빚 부도 주식투자 도박 등 경제문제(13.9%)가 자살 위기의 원인이 된 경우도 40, 60대를 중심으로 높게 나타났다. 특히 경제 활동이 활발한 40대 뿐 아니라 60대 이상 노인들도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평생 자식들을 부양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경제적으로 지원을 못 받는 노인들이 쉽게 절망감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밖에 남성들은 경제문제에 대한 고민이 큰 반면, 여성들은 이성문제가 골칫거리였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정민승기자 msj@hk.co.kr
■ 연령대별 자살상담 사례
●10代-"하루에 학원만 3곳… 입시 매달린 삶 끔찍"
고교 2학년 학생입니다. 중학생이 되면서 어머니의 스케줄 관리가 시작됐습니다. TV는 상상할 수도 없고, 인터넷 사용도 어머니의 감시 대상입니다. 하루에 학원 3곳을 가야 해 밤 12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 옵니다. 아직 대학입시가 1년이나 남았는데 이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끔찍합니다.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촌(富村)에 살지만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올해 절친했던 사촌 형이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자살했습니다. 그걸 본 뒤 마음이 늘 불안합니다. 때로는 따라 죽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20代-"너 얼굴이 그게뭐니… 따돌림에 환청까지"
대학 3학년 학생입니다. 주소야 서울 강남이지만 실제로는 산동네 쪽방에 삽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잘 사는 아이들에게 "옷이 싸구려야" "지저분하고 못생겼다"는 등 가정 형편이나 외모로 '왕따'를 당해 왔습니다. 그래선지 다른 사람이 날 항상 괴롭히고 욕한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이제는 환청도 들리고 죽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수면제를 먹기도, 손목을 칼로 긋기도 해봤습니다. 인터넷 자살사이트를 찾기까지 했습니다. 상담과 정신과 치료로 심리적 안정을 찾아 가고 있기는 하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는 부모님께 치료비를 의지하는 것이 괴롭습니다.
●30代-"동업자에 사기당해 주변사람조차 외면"
컴퓨터 관련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년 만에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하고 1억원의 부채를 떠안게 됐습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으로 통하던 저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사기꾼으로 몰더군요.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 같았습니다. 잠을 못 이루고 밥을 먹으면 모두 토해버렸습니다. 미처 몰랐지만 심리적 고통이란 게 몸으로도 나타나는가 봅니다.
우울증도 심해져 저도 모르게 여러 번 자해했습니다. 그래도 전 운이 좋은 놈인가 봅니다. 가족의 간절한 설득으로 치료를 받으면서 서서히 옛 모습을 되찾고 있습니다. 취직도 하고 새로운 삶의 의욕을 갖고 싶습니다.
●50代-"아내 손찌검 버릇이 처자식 가출로 비화"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처자식이 저를 버린 지 6개월째네요. 사실 젊을 때 좋은 남편, 좋은 아빠는 아니었습니다. 해외로 돈 벌러 가서 오랫동안 가장 역할을 못했고 귀국 후에는 술을 많이 먹고 아내를 때리기도 했지요. 그래도 저는 마을버스 운전으로, 아내도 이것저것 일을 하며 맞벌이로 열심히 살았고 아들도 어느새 사회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제 행복하게 살아야지' 했는데 그만 술을 먹고 아내에게 또 손찌검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집을 나가버리더군요. 모두 저를 외면하니 죽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독극물도 샀다 버렸습니다.
●70代-"아내는 먼저 하늘로 자식들은 돈타령만"
아내가 심장병으로 죽었습니다. 절망감에 빠져 늘 극약을 가지고 다닙니다. 애들은 다 커서 결혼했지만 독립을 하지 못하고 돈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다 큰 아이들 뒷바라지 하느라 많던 재산도 모두 탕진했습니다.
더 이상 삶의 희망도 없어 밤에 혼자 흐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내를 먼저 보낸 뒤 자살하려고 두 차례나 수면제를 먹었습니다. 애들은 이런 제 속을 전혀 모르더군요. 우연히 서울시 광역정신보건센터에 상담을 했는데 상담원이 아들 딸까지 상담을 하더군요. 아이들도 내 마음을 알아주고 서로 이해하고 아끼게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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