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세계 산악계는 한 여성의 포효 앞에 숨을 죽였다. 당시까지 8,000m 산 6개를 올라 여성 최다 기록 보유자였던 그녀는 “앞으로 1년 안에 남아 있는 8,000m 산 8개를 모두 오르겠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던 것이다. 그녀는 이 프로젝트를 ‘꿈의 캐러밴’이라 이름 붙였다.
자신이 평생 동안 추구해 온 히말라야 고산 등반의 대장정을 멋지게 마무리 지으려는 원대한 꿈이다. 만약 그녀가 범상한 산악인이었다면 아마도 조롱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산악계는 그녀의 말을 허풍이나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20세기 최고의 여성 고산 등반가 반다 루트키에비치(1943~92)였던 것이다.
반다는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성품의 산악인이다. 그녀의 기자 회견 직후 몇몇 남성 산악인들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반다는 대뜸 되받아쳤다. “왜요? 8,000m 산 14개를 모두 오르는 것이 남성들만의 게임인가요?” 왜 무리하게도 1년 만에 모든 등반을 끝내려 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제 내 나이도 50을 바라보고 있어요. 시간이 별로 없다구요. 게다가 일단 8,000m 산에서 고소 적응이 이루어져 있다면 속전 속결로 끝내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라는 것은 이미 상식이 아닌가요?”
반다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리투아니아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워낙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는데 전쟁까지 겹쳤으니 그 성장 과정이 비참했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반다는 먹을 것이 없어 염소 젖을 먹으며 자라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가난조차 농담의 대상으로 삼아 시원하게 웃어 젖힐 만큼 통이 큰 여자다. 반다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며 웃어대곤 했다. “제가 본래부터 강인한 체력을 타고 났다구요? 천만에! 염소 젖을 먹고 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돼요. 여러분도 한번 장기 복용해보세요!”
폴란드의 과학기술고등학교에서 10대를 보낼 때만 해도 그녀는 착실하고 공부 잘하는 장학생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바위맛’을 알게 된 18세 이후 그녀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다. 오직 바위와 얼음 그리고 만년설로 뒤덮인 히말라야가 그녀의 눈 앞에서 어른거리게 된 것이다.
반다는 19세 때 우수한 성적으로 등산 학교를 졸업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미 이 때부터 ‘성차별’의 높은 벽을 절감하게 된다. “강사들은 내가 여자라고 해서 겁만 주기 일쑤 였죠. 끔찍한 등반사고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여자가 도전하기에는 너무 터프한 분야라고 말하곤 했죠. 나는 그 때 마음 속으로 외쳤어요. 여자인 내가 너희들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지!”
당시는 흔히 ‘철의 장막’이라는 말로 표현되던 동서냉전의 시대였다. 하지만 집요하고 억척스러운 성격의 반다는 그 두터운 장막을 헤집고 나와 22세 때 알프스에 첫 발을 내딛는다. 훗날 ‘폴란드가 낳은 철의 여인’이라 불린 한 위대한 여성 산악인의 첫 번째 비상이다.
당시 그녀에게는 알프스의 등반대상지까지 타고 갈 케이블카나 리프트 삯을 지불할 돈조차도 없었다. 하지만 반다는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자일 파티(암벽, 빙벽을 등반할 때 자일을 묶고 함께 오르는 파트너)들을 이끌고 당당히 아이거 북벽과 마터호른 북벽에 올랐다. 특히 마터호른 북벽은 동계 여성 세계 초등이다. 이쯤 되자 보수적인 남성 우월주의에 가득 차 있던 폴란드 산악계에서조차 그녀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1978년 폴란드에서는 두 명의 국민적 영웅이 탄생한다. 한 명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된 캐롤 보이틸라였고, 다른 한 명은 여성 단독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반다 루트키에비치였다. 하지만 그녀의 에베레스트 단독 등정에는 뼈 아픈 내막이 있다.
당시 그녀가 속해 있던 원정대는 카를 헤를리히코퍼가 지휘하는 국제 합동대였다. 그런데 헤를리히코퍼가 반다를 부대장으로 임명하자 문제가 발생했다. 남성 대원들이 여성 부대장으로부터 지휘 받는 것을 치욕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기가 막히더군요. 심지어 그들은 나와 함께 자일을 묶는 것조차 거부했어요. 그래? 좋아! 그렇다면 나 혼자 올라가지! 제 에베레스트 단독 등반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거에요.”
여성 세계 초등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반다의 K2 등반 역시 그야말로 피눈물 나는 역사를 가졌다. 82년의 첫 도전에서 그녀는 동료를 잃는다. 84년의 재도전 역시 강풍과 폭설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야 했다. 그녀의 리더십에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하는 남성대원들과의 갈등에 지친 반다는 86년이 되자 아예 소규모의 알파인 등반 방식으로 K2에 세 번째로 도전하여 몇 차례의 사선을 넘어선 끝에 그 정상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친 김에 그 동안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히말라얀 레이스’에 뛰어든다. 그것도 1년 안에 남아있는 8개의 산에 모두 오르겠다는 야심찬 기자 회견과 함께.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반다의 ‘꿈의 캐러밴’ 프로젝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그녀는 기자회견 이듬해인 91년, 초오유와 안나푸르나 2개의 산에 올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92년에 남은 6개를 해치우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92년 봄, 9번째 산인 캉첸중가 8,300m 부근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인 후 영원히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반다의 ‘꿈의 캐러밴’ 프로젝트는 그렇게 실패했다.
하지만 그녀의 등반과 삶조차도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반다는 말한다. “등반의 본질은 정상에 서려는 노력 따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을 극복하려는 결단들의 연속일 뿐이지요.”
나는 그녀에게서 비극적인 시지푸스의 초상을 본다. 그 시지푸스는 남성이 아니다. 반다는 히말라야의 고산과 더불어 남성 중심의 장벽에 끝없이 도전했던 불굴의 여인이다.
■ 한국 원정대가 목숨 구해주자 스틱 없어졌다며 되레 짜증… 거친 성품의 '여장부'로 유명
반다 루트키에비치의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언행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같은 여성 산악인이면서도 프랑스의 카트린느 데스티벨이나 미국의 린 힐과는 전혀 다르다. 카트린느나 린이 ‘여성적’이라면, 반다는 명백히 ‘남성적’이다. 남성 산악인들은 어떤 뜻에서 그녀를 두려워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반다는 포부나 추진력, 테크닉이나 파워, 더 나아가 성품이나 언행에서조차 남성들을 압도하는 면모를 보였다.
반다는 27세 때 폴란드 보건성 간부의 아들인 수학자 보이테크 루트키에비치와 결혼했지만 3년 만에 이혼한다. 남편이 그녀의 위험한 등반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K2에 처음 도전하기 직전 엘브루즈에서 훈련 중 다리가 부러지는데, 당시 그녀를 치료해 줬던 오스트리아의 의사 헬무트 샤페터와 재혼하지만 그 결혼 생활 역시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한다. 그녀에게 있어 남성들과의 대립이란 등반 과정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결혼 생활에서조차 피해갈 수 없는 통과 의례였던 모양이다.
반다의 거친 성품은 86년 한국 K2원정대의 기록인 김병준의 ‘K2, 죽음을 부르는 산’에도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던 그녀를 구해준 것이 바로 한국 원정대였는데, 그녀는 회복되자마자 자신의 스틱이 없어졌다면서 마구 짜증을 냈다는 기록이 있다. 반다와 관련된 이런 저런 기록들을 읽다 보면 가슴 한 켠에 물기가 머금어진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여장부의 삶이란 어떤 뜻에서 ‘상처뿐인 영광’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녀가 캉첸중가에서 실종되기 직전 남긴 등반일기가 가슴을 친다. “나는 산에서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곧 그 일을 경험하게 되고 익숙해질 것이다. 친구들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산악 문학 작가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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