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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시인 산문집 '목소리의 무늬'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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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시인 산문집 '목소리의 무늬'펴내

입력
2006.09.06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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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통화내용이 들린 처음에는, 젊은 놈이 무슨 식충이같이 먹는 얘기를 저렇게 열성적으로 하나 한심했는데 곧 우습고도 애틋하고 풋풋하게 느껴졌다. 술도 아니고 담배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대나 떡볶이도 아닌 바로 막창에, 그 건강한 성년의 음식에 이제 막 맛을 들이고 저렇게 감동하는구나! 나도 막창에 막 연정이 생기려 했다. 나는 그가 호감과 존중심에 차서 은영씨를 은영씨라고 부르는 게 좋았다. 제 돈으로 식당을 드나들게 된 지 얼마 안 된 듯한 그가 그 어린 신사의 마음과 언행을 길이 변치 않았으면 싶었다.”(47쪽)

그의 오지랖은 아름답다. 같은 버스를 탄 20대 청년의 전화통화를 들으며 그의 행복을 기원하고, 사라진 단골식당의 옛 명함을 보고 문득 눈물을 글썽인다. 2,000원짜리 양파를 1,500원에 깎아준다는 노점상 할머니에게 안 그래도 싼데 왜 깎아주냐며 제값을 다 치르고, 술자리에서 난동을 부리는 후배를 홀로 말리다 피를 보기도 한다. 사소한 것일수록 놓치지 않는 그의 넓고 따스한 오지랖이 읽는 이의 마음을 가만히 데운다.

황인숙 시인이 깊고 따스한 시선으로 일상을 응시한 산문집 ‘목소리의 무늬’(샘터, 9,500원)를 펴냈다. 3년 만에 펴낸 이번 산문집은 때로는 조근조근 써내려 간 일기장이기도 하고, 때로는 흥분에 달뜬 여행기이기도 하며, 때로는 베껴 써보고 싶은 독서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형식의 글에서든 독자는 타인의 일을 내 일처럼 겪어내는 이 무구한 시인의 치환 능력을, 연민과 배려로 충일한 치환의 상상력을 확인하게 된다.

“‘버림받은’ 사람은 자기 비하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그 역시 몰락했을망정 사랑의 귀족이다. 세상에는 실연도 한 번 못해 본 사랑의 서민도 많다. 그래도 그의 지위는 어떠한 죽은 사람들보다 높다.”(45쪽)

“자신을 위해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물건도 선물을 위해서는 사게 된다.…선물이란 게 없었으면 가난한 여인네들의 화장대에서 레티놀 크림이나 향수나 장신구를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난한 남정네들이 비단 넥타이니 금장 라이터나 질 좋은 구두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한 어린애들이 인라인스케이트나 플레이 스테이션을 구경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80~81쪽)

시인은 아름다움을 찬미할 땐 우미한 목소리를, 가치와 신념을 주장할 땐 수줍은 목소리를, 좋아하는 사람과 일을 소개할 땐 경쾌한 목소리를 내며 다양한 목소리의 무늬를 펼쳐보인다.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무늬, 유머. 식빵의 건포도처럼 곳곳에 박혀있는 시인의 유머가 읽는 사람을 실없어 보이게 만든다. 재즈댄스 정복기가 특히 그러하니 주의를 요하는 바이다.

“4주동안 들어온 음악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지난여름의 재즈 다이어트 시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네. 단 하루도 안 늦은 적 없지만. 지난여름에 나도 재즈댄스를 해봤네. 걸음이 리드미컬해졌네. 팔도 좀 가늘어졌다네. 다이어트 재즈댄스, 또 하고 싶네.”(70쪽)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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