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통일조국의 수도가 될 서울에서 꼭 한번 전시회를 갖고 싶었습니다."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학고재 화랑. 백발이 성성한 노화백이 한 점 한 점 자신의 작품을 벽면에 걸고 있었다. 1942년 그림을 그리겠다는 일념에 일본으로 건너간 지 64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오병학(82) 화백이다. 그의 떨리는 손길이 지나칠 때마다 갤러리의 하얀 벽면은 강렬한 색채와 역동적 터치 가득한 탈춤의 공간으로 변신한다.
"어릴 적 가을걷이철이 되면 고향에서 늘 보던 탈춤의 모습입니다. 비록 몸은 조국을 떠났지만 우리민족 고유의 감성은 평생 제 그림의 테마가 됐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계 동포 1세 화가인 오 화백이 6일부터 19일까지 학고재에서 60여년 예술작업을 회고하는 '오병학 전'을 연다. 그림 속에 가득한 탈춤의 신명과 백자항아리의 풍성한 곡선에는 일제와 분단, 그리고 '재일(在日)'이라는 숙명을 온몸으로 겪어온 노화백의 민족애가 응축돼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서울에 전시되기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오 화백은 1924년 평안남도 순천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환쟁이는 집안 망친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예술대에 입학했지만 일본인 교수들에게 실망해 곧 학교를 그만뒀다. 이후 신문배달부 전화교환수 등으로 일하며 혼자 그림공부에 매달려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그림의 형식은 인상파 화가 폴 세잔의 기법 등 서구의 것을 빌렸으나 그림의 내용은 민족적 정서였다. 그가 평생 천착해온 탈춤이라는 화두에는 '동(動)과 정(靜)의 혼융'이라는 우리 정서의 특징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림을 통해 한평생 우리민족의 정서를 예술로 승화시켜온 그에게 그러나 조국은 멀리 있는 존재인 듯했다. "남한에는 월남한 동생 가족이 살고 있고, 북한에는 일본에서 낳은 딸이 살고 있습니다. 어느쪽도 나를 순수한 미술가로 받아들여주지 않았지요."
반목의 지난 세월을 회상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회한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민족을 향한 그의 애정은 그림 속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오 화백은 2001년 경의선 복원사업이 시작될 무렵, 자신의 그림이 든 '꿈의 기차표'를 만들어 1,000엔씩 받고 재일동포들에게 팔았다. 그렇게 마련한 3,200만엔의 기금을 경의선 복원사업을 지원하는 단체에 기부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활발한 창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오 화백은 "얼마 전 600호짜리 탈춤 연작을 시작했다"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그것을 전시하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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